[산동문단 총점검] <흑룡강신문> 개혁개방 40주년 기념 "녹환컵" 수필 공모 우수상 수상작 (2018년)

 

수필 

 산다는 것은

 주해봉

 

끝나지 않을 같았던 지긋지긋하고 끈적끈적한 무더위도 자연의 섭리에는 어쩔 재간이 없었나 보다. 어느덧 한밤중에는 창문을 닫고 자야 할만큼 서늘해졌다. 가을이다. 울긋불긋 코스모스 꽃밭 위로 파란 물감이 뚝뚝 떨어질 듯한 가을 하늘, “천고마비의 계절”이란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가을 하늘은 어김없이 쪽빛 바다처럼 깊고 높고 푸르다. 어느새 등산에 최적인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솔직히 나는 한국에 오기 전에는 거의 등산을 해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 반급 학생들과 여름 방학에 소풍삼아 아름드리 소나무로 꽉 들어찬 소흥안령 자락의 량자하 유원지에 도시락 싸들고 가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는 환경의 지배를 받아서랄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원들과 함께 산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산을 오르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1922년 에베레스 북벽8230m 까지 처음 무 산소 등정을 했던 영국 등산가 조리 맬러리는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간다”고 했다. 1801년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됐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등산은 외로움을 다래기 위해서였다. 건강, 친목 등등 등산 목적은 등산객 수만큼 이나 많을 것이다.

 등산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에 머물러 온지도 어언 20년이 가까워오고 산을 타기 시작한지도 어언 10년이 되었다

하지만 정확히 산행을 시작하게 동기는 느닷없이 등산을 하는 꿈을 꾸면서부터였다. 어느 날인가 나는 꿈 속에서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 한라산 등정을 하였다.

등산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바닷가에 서서 망망대해를 마주하고 해돋이를 구경했다. 8월인데도 바다 바람은 차가웠다. 온 몸이 오그라들 정도여서 전신을 부르르 떨며 수평선을 응시했다. 동쪽 바다에서 선홍빛 점이 아른거리나 싶더니 불덩이가 불쑥 수평선 위로 솟아올랐다. 순간 온 세상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황홀경에 나는 귀가 먹먹해지며 온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느꼈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둘이서 제주도 바다 가에서 일출을 구경해야지.)

바다가의 싸한 새벽공기와 함께 뭔가 뭉클한 것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일출 구경을 끝낸 나는 본격적인 한라산 등정을 시작하였다. 헌데 워낙 산행 경험이 부족하고 체력적으로 딸리는 상황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던 나는 그만 다리가 풀리며 실족을 한 채 아찔한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넌 이젠 죽은 목숨이다. 만약 다시 살고 싶거든 앞으로 꼭 등산을 견지하거라.

소리 없이 나타난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산신령님의 간곡한 귀띔이었다.

필경 꿈이었다. 꿈이었지만 그처럼 생생하였다. 헌데 아무리 황당한 꿈이라 하지만 정말 죽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어수선하고 느낌이 이상야릇하게 침침했다.

 거짓말 같이 꿈을 후부터 시간 나는대로 꾸준히 산행을 견지하였다. 꿈이지만 산행을 멈추면 죽을 수 있다는 산신령님의 충고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이 너무 일찍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고 가장 불행한 것이 너무 늦게 사랑을 깨우치는 것이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만큼 꿈에서의 죽음이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수시로 되돌아본다.

  더듬어보면 30대 후반의 텅 빈 배낭에 삶에 대한 물음표만 한가득 집어넣은 채 코리안 드림의 열풍에 휘말려 한국행에 몸을 던진 나, 분명 조상님들이 살아온 고국이었지만 나에겐 엄연히 낯선 이국이었고 마냥 따뜻한 보금자리만은 아니었다. 사유재산이 최우선시 되고 금전만능이 판을 치는 익숙하지 않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온 몸으로 받아 안은 첫 느낌은 놀라움과 망설임과 의구심이었다. 상상을 완전 벗어난 냉혹한 현실 앞에서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건설현장의 철근, 형틀목수, 깊은 산 속의 돼지농장 사양원, 아파트 청소부, 일용직 잡부, 호프집 주방장, 그리고 회사원, 내 작은 몸뚱이에 이처럼 수많은 직명을 달아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부평초마냥 한국 팔도를 떠돌며 눈물과 피땀으로 곳곳에 아픔의 흔적을 남겼던 지울 수 없는 자취, 듣기 거북한 말로 표현한다면 그야말로 개고생을 하며 살았지만 긍정적인 언어로 구사한다면 열심히 살아온 모습이라 하겠다. 그 대가로 꿈만 같게 아파트도, 자가용도 생겼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은 허전하다. 끝없는 욕심이 작간해서만은 아니다.

 언제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을 우선시했던 시간들, 남에 뒤지지 않는 열정과 끈기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지만 결코 충만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던 가슴, 자신이 아니라 남들의 시선에 꿰맞춰 살아온 껍데기 삶, 능동적이 아닌 피동적인 움직임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나라(중국)에 대한 고민, 나의 근원과 조상의 나라인 한국과 조선의 대조적인 현실로 더욱 갈피를 못 잡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이데올로기에 대한 갈등으로 본의 아니게 이중삼중으로 무거워지고 아프고 슬프고 외로워진 심신 때문일 수도 있겠지!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어느새 불혹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어 반백의 중반에 머물고 있으니 모든 것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그간 살아오면서 몸으로 깨우친 것들을 현재가 아닌 과거 20년 전의 30대에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과연 물불 가리지 않고 교사의 옷마저 벗어버리고 한국행을 단행했을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원인 여하를 불문하고 분명 마음이 시킨 결과물이다. 내가 저지른 인생연극의 한토막이다. 모르는게 약이 되고 아는게 힘이 될 때도 있다. 어쩌면 앎은 또다른 새로운 의문을 낳는 것 같기도 하다. 세상사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을 것 같은 반백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의혹과 고민을 한 가득 짊어지고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어딘가 서글픈 마음 금할 길 없다.

 인간은 누구라 없이 먹고 살기 위해 일하며 살기 위하여 때론 고통과 위험마저도 서슴지 않는다. 어쩌면 앞뒤 재지 않고 무작정 한국행에 뛰어든 것 역시 보다 잘 살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데 지금 난 정말 잘 살고 있는지? 생각보다 생은 너무 짧은데 나를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고민의 늪에서 허덕인다.

돌아가신 삼촌의 모습이 느닷없이 떠오른다. 항상 당당하고 떳떳하게 하늘이 무너져도 끄떡없을 모습으로 마을에서 힘들고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시던 삼촌이다. 마을의 초상집을 도맡아 언제나 시신을 다루며 유가족의 무거운 마음을 덜어주시던 삼촌, 시도 때도 없이 밤을 패가며 고생하시는 모습이 안쓰럽게 여겨져 집식구들이 “돈 받고 하는 일도 아니니 이젠 그만두세요.” 라고 거듭 만류하였지만 그때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할뿐이니 걱정마라”며 그 일에서 끝내 손을 떼지 않으시던 삼촌, 그런 삼촌에게 어느 날 갑자기 위암말기 진단이 내려졌다. 죽음 앞에 선 임종환자들을 밤을 패가며 위로하고 사후 뒤뒷습을 해오던 그에게, 정말 한번도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삼촌에게 시한부 선고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당시 끝없는 절망과 회한 속에 빠져 있던 삼촌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팔에 꽂은 링거를 빼버리고 약을 거부하며 빨리 죽고 싶다며 안락사를 요청하였고 뜻대로 안되자 일절 한마디 없이 무대응하시다 갑자기 성경책을 읽어 달라하시던 모습, “후회가 없어, 나 편하게 갈 거야 ” 유언처럼 남기신 그 마지막 한마디는 결국 삼촌의 마음에서 우러러 나온 진심이셨다.

처음에는 부정과 분노, 다음에는 절망과 타협, 우울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수용의 단계까지 고스란히 밟는 과정, 그처럼 세상에 무서운 것 없이 당당하기만 하던 당신도 역시 시한부 선고를 받고서는 여느 암환자와 한치도 다를 바 없었다. 아마도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두려움이 인생을 휘감는 순간 누구나 엄청난 내면의 변화를 겪지 않을까 싶다.

 현실이 아닌  속에서의 죽음을 잠시 경험하였지만 이제부터 남은 시간만이라도 철저히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거짓 없는 생각이 집요하게 갈마든다. 어차피 살면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이별, 상실, 고통, 죽음 같은 것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렇다할 때 궁극적으로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이고 그리고 무엇이 진정 의미 있는 인생일까? 불철주야 미친 놈마냥 너무 바쁘게 달려온 거칠어진 내 모습이 허허벌판에 세워진 허수아비처럼 어설프고 엉성하게 비껴온다.

 살아가면서 아파트가, 자가용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인생의 전부만은 아닌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내 몸과 마음이 더 망가지기 전에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 단 한번뿐인 소중한 인생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기뻐하며 나에게 허락된 시간을 남김없이 녹여가는 것, 그런 것들이 진정 현실로 탈바꿈 되었을 때 “아! 이제는 죽어도 좋다”는 감탄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을까! 어쩌면 그 순간이 자신의 의지를 현실에 꺾이지 않고 관철하는 찰나가 아닐지?

 고즈넉한 시골에서 텃밭 가꾸며 조용히 살아가는 것도, 고층빌딩 즐비한 대도시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동분서주하는 것도, 그리고 단풍 깃든 가을 들녘에서 무르익은 전야를 바라보며 사색의 나래를 펼치면서 휴식의 한 때를 즐기는 것도 우리들이 살아가는 한 모습이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울고 웃으며 그리워하고 미워하며 후회하고 고민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가 그려가는 저마다의 자화상이 아닐까? 그렇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마냥 그리워하고 미워하고 후회하고 고민하고 아파하는 것이 아닐지?

 갈피 잡을 없는 복잡한 울타리 속에서 흔들림 없이 마음이 가는대로, 가슴이 시키는대로 행한다는 것, 어쩌면 삶에 있어서 그것이 가장 후회 없이 살아가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옆에서 바라보기엔 시도 때도 없이 시신 주물며 살아오신 삼촌의 모습이 이해할 없을 정도로 이상하게 여겨졌을 수도 있겠지만 삼촌 자신은 꼬물만한 대가도 없이 일하셨지만 자신이 원해서 하는 봉사였기에 보람과 자긍심을 느끼시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찌그러져 가는 오막살이에서 조밥에 된장 찍어 먹어도 웃으며 하고 싶은 일 하며 살면 그것이 행복이여!”

평생 고향마을에서 똥냄새 맡으시며 키우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입버릇처럼 외우시던 말씀이 귀전에 쟁쟁하다. 엽초 태우시며 소리 없이 미소 지으시던 그 모습이 눈에 밟혀온다.

   같은 세월이다. 들이미는 가을의 뚝심에 못 이겨 어느새 저만큼 멀어져간 여름의 뒷모습, 늘 이렇게 가고 오는 계절이지만 그래도 가을의 언덕에 서고 보니 스러져간 여름이 벌써 아쉬워진다. 유난히도 끈적끈적하게 무더웠던 날들조차 그리워진다. 고등학교 시절 소흥안령 자락에서 눈도장 찍었던 그 아름드리 소나무의 모습도 그리움의 꼬리를 물고 점점 짙어진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그리워하고 아파하고 후회하고 고민하는 것인가 보다.

 

 

 

 

주해봉 프로필

흑룡강성 탕원현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통신학부본과 졸업.

탕원현조선족고급중학교 전직교.

여러 신문 잡지에 소설,수필,  다수 발표.

흑룡강신문 수필 문학상 우수상 수상(2018). 한국"문학의 강" 시 신인상 수상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