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무정하지만 전통은 유정하리

최화길 시인의 근작시를 읽고 

김영수

 

 서로 다른 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각자 시대를 살았던 삶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더우기 민감한 촉수를 가진 시인의 경우 그들의 시에는 직 간접적으로 그 시대를 겪어온 삶의 자세들이 여실하게 드러나 있다. 세월이 흘러 세태가 변화하였지만 지나간 삶들의 역사를 잊지 않고 뒤돌아보며 그 속에서 한 시대를 대면했던 그들의 바람직한 삶의 태도와 지혜를 발굴하고 이어나가는 것을 우리는 전통에 귀결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인간학을 시사한다는 입장에서 시적 장르에서도 전통의 맥락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하여 최화길 시인의 시에 대한 비평 역시 위에서 설한 전통이란 의미 맥락에서 출발하였다.

우선 부동한 시대를 살아온 만큼 시인의 시에서 보여준 정감적인 대응방식과 이미지의 구성과 처리 상징적 수법들은 현시점에서 , 그리고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과 시각적 차이 등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약간 탐탁치 않았음을 밝혀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 시가 던져주는 내용과 언어와 이미지들은 전통의 의미에 안주해 볼 때 그 미흡한 점들을 보완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다.

 

둥근 그리움 하나/ 구워내는 데/ 무한 세월 얼마나/ 속을 끓였고/ 가슴마저 시리게/ 텅 비어버린/ 시냇물은 얼마나/ 외로웠으랴/ 찬 기운 높이 서린/ 가을 하늘에/ 바람 타고 우줄대는/ 구름 헤치며/ 기어이 환한 얼굴/ 하얗게 웃는/ 당신의 발자취엔/목련꽃 핀다

〈둥근달〉전문

 

감정을 가진 생명개체는 독립성을 가지고 있지만 결코 따로 분리되어 존재할 없다. 특히 시인의 경우 사물들은 그들 정감의 상징성을 강력하게 대변한다. 이 상징성은 통합의 정서를 지향한 시적 정신에 근거하여 위의 시에서 개체의 외로움 극복이란 밝은 정서를 마련하고자 한다. ‘둥근 그리움을 구워내며’ ‘속을 끓이는’ 전통적인 민족 이미지인 달의 모습을 의인화수법으로 형상화하면서 둥근 달이 시냇물에 흘러가며 그리움이 외로움을 달래고 ‘당신의 발자취에 목련꽃 피는’ 목가적인 이미지조합을 구성하고 있다. 특히 ‘발자취에 목련꽃 핀다’는 표현은 고전적이면서 아름다운 표현이다.

 

하늘 쳐다보는 맑은 / 바람에 눈빛 흐려지고/ 구름에 눈길 가려져도/ 변함없는 초심의 해바라기/ 하많은 이야기 생동하고/ 끝없는 추억이 어려있다/ 갔다가 온다던 순이는/ 종내 나타나지 않았지만/ 열련에 빠졌던 마른 기억은/ 빨갛게 가슴에 새겨져있다/ 목마름 하나 둘 사라지며/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섬/ 바람마저 갈 길 성급한 듯/ 그림자도 말끔히 지운다만/ 티끌 하나 찾을 수 없는/ 순정/ 숱한 갈증 거울처럼 닦았어도/ 자신의 갈증에는 망연할 뿐이다.

〈옹달샘〉전문

 

지나간 단락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시다. 더 좋은 삶을 위하여 타국으로 떠나야 했던 과거의 삶에는 운명의 지침을 돌려세운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그 속에는 고향을 등진 자의 수많은 슬픔과 하소연들이 시인이 설한대로 ‘빨갛게 가슴에 새겨져 있다’.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이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마음의 한 구석에 ‘끝없는 추억’으로 어려있다. ‘티끌없는 순정’을 간직한 시인과 그 ‘갈증에 망연할 뿐’인 시인에게 그리움의 대상인 ‘순이’는 종내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는 많은 세월이 흐르고 사람도 사건도 기억의 ‘외루운 섬’에서 지워지지만 그 순정을 잊지 못해하는 시인의 모습이 이 시를 통해 간절히 나타난다. 사랑의 과정조차 생략되고 사랑조차 부담으로 안겨오는 이 아이러니한 시대에 순수한 사랑을 했던 과거의 전통 시인과 시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아니면 불행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 시는 시인이 묻고 싶어하고 필자 역시 묻고 싶어하는 것에 대하여 공감의 장소를 마련하고 있었다.

 

이겨진 메밀가루/ 익은 반죽이/ 와장창 지렛대에/ 짓눌리우면/ 결 고운 국수오리/ 하늘 땅 잇는다/ 한낮의 뜨거운 갈증/ 달래는 냉면잔치/ 삼복염천 땡볕이/ 와르르 무너진다.

〈소낙비〉전문

 

기발함과 생동성이 돋보인다. 하늘이 ‘지렛대’로 ‘짓눌려’ 만든 ‘국수오리’, 그 국수오리가 ‘하늘 땅 잇는다’는 대목과 ‘냉면’이 되어 ‘삼복염천’ ‘한낮의 갈증을 달랜다’는 것은 시인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또한 ‘땡볕이 와르르 무너진다’는 형상적인 언어로 그 시원함을 표현한 생동성도 높이 사줄만하다.

시는 다분히 토속적인 분위기를 띠었다는 데서 나름대로의 전통적 맛과 의미를 갖고 있지만 비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의 정감적인 특성상, 혹은 비에 대한 내면의 보편적 공감을 끌어내는 데 있어서 ‘국수오리’라는 이 비유가 다소 시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데는 훌륭하다고 보지 않는다.

 

밤이 더는 밤이 아닐 / 그 암담했던 밤은 그리움이다// 마주했던 그 때를 잊었다면/ 그 때가 도리어 마음을 괴롭힌다// 매일을 덧없이 보내고 있지만/ 그 매일이 의미 있는 보석이었다// 사는 일이 번거롭다면/ 죽음은 오히려 가벼운 날개// 죽기 위해 사는 일이 아니지만/ 죽음은 살았다는 증명으로 충분하다// 한가하면 되려 허전한 요사함/ 속이며 속히우며 해달은 바뀌운다.

〈역리〉전문

 

순간을 대하는 태도에서 인생은 가치가 결정된다. 미래는 발생하지 않았고 과거는 소실되었으며 오직 순간만이 유일한 삶의 현장이다. 순간으로 구성된 매일은 보석보다 더 귀중한 삶의 현주소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지나온 삶을 살아온 선배로서 우리에게 삶의 충실성과 집중성을 충고한다. 그러나 보석과 같은 매일을 살아가지만 사람들은 덧없이 하루를 보내며 단순히 허전함을 무마하기 위한 수단으로 속히우며 산다는 의미를 보여준다. 다만 이 시는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기에 앞서 시적 언어의 모호성으로 설득력을 가진다고는 보기 힘들다. 이를테면 ‘그 때’라는 이미지가 더욱더 섬세한 이미지로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매일이 의미 있는 보석이었다’는 시행까지는 이해접근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이어 전개되는 일련의 시행과 특히 그중 ‘죽음은 살았다는 증명으로 충분하다’는 구절에서 필자는 죽음과 삶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철학적 풀이가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불에 크게 데였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 순간이 너무 아찔해/ 아예 뜨겁다는 느낌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런 체험/ 직접 할 수도 없는 일/ 오직 그대로 믿을 수밖에/ 문제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조금씩 엇갈리었다/ 그렇다거니 그렇지 않다거니/ 서로 차이가 생기면서/ 진실은 불편해지고/ 울적할 때가 많아진다.

〈진실〉전문

 

‘진실은 불편해지고/ 울적할 때가 많아진다’는데 공감이 가게 된다. 특히 요즘처럼 정보의 범람으로 무엇이 진실이고 가짜인지 구분할 수 없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물론 ‘불에 덴 사람’과 같이 진실을 체험한 당사자의 말이 신빈성이 있지만 그런 일을 경험하지 못했으면서도 말을 그럴듯하게 하는 사람들의 말이 최초의 사실과 진실을 흐리게 한다. 그리하여 진실 대신 그릇된 유언비어들이 생겨 이 사회를 좀먹기도 한다. 또한 역사의 진실이 왜곡되어 후세 사람들의 상황인식에 착오를 심어줄 때 훗날 큰 불행을 자초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시는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일으키는 우리 삶의 한면에 대하여 연장자로서 경계의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

 

창을 열면 시원한/ 숨결 푸르다/ 궁금증 하나 없는/ 산뜻한 체취/ 너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신념 같은 존재로/ 기를 세운다/ 세월 속의 부조화/ 목묵히 새기며/ 소리없이 거창한/ 그물 늘인다/ 하늘에 치솟고/ 땅 속을 누비는/ 허리 하나 꿋꿋한/ 열혈 사나이/ 끊어져도 휘지 않는/ 영혼이기에/ 어둠이 물려가는/ 소리 들리고/ 밝음이 다가서는/ 모습 보인다/ 그리고 꼬소한 깨알맛/ 오롯이 싹 튼다.

〈나무〉전문

 

하늘을 지향하는 푸른 영혼을 지닌 나무이다. 그 어떤 세월 속에서도 휘청이지 않고 꿋꿋한 신념을 지키며 땅을 지켜 서있다. 그런 나무이기에 시인은 창을 열면 나무의 시원한 체취를 맡을 수 있었고 나무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한 기운은 열혈 사나이의 기백으로 의인화되며 세상의 어둠에 대한 두려움 대신 밝음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고 설한다. 나무라는 자연물에 대한 관조에서 이 땅에 서있는 사람은 과연 어떤 영혼을 지녀야 하는가에 대해 시인은 자신에게 반성하며 긍정적인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그물 늘인다’에서 ‘그물’과 ‘꼬소한 깨알맛’에서의 ‘깨알맛’ 이미지는 ‘시원한’. ‘푸른’, ‘열혈 사나이’를 강조하는 전반 시의 이미지 설정과 정감적 의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느낌이 안들었다.

 

해달의 심상에는 그림자가 없을 / 아픔이 없다는 선입견은 오산이다// 강물이 소리치는 연유 우리가 모를 뿐/ 즐겁다는 명명은 사람들의 억측이다// 바람의 비명소리 귀로 들을 뿐/ 구원의 손길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름드리나무의 드높은 지조/ 연륜에 있는 걸 우리는 왕왕 스친다// 수박의 속맛은 귀신같이 알아도/ 매일의 참맛에는 오히려 눈이 어둡다.

〈총명의 비애〉전문

 

물질과 관능주의적 삶에 치중하고 갈수록 시간에 쫓겨 사는 현대인의 생활은 어쩌면 비애를 넘어섰다고 말하고 싶다. 아니 비극적인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삶의 본질과 중심을 외면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표류하는 섬과 같이 바다에 함몰될 것이다.

시인은 시에서 현상만을 보고 느끼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것을 경계한다. 그것은 자세히 보지 않는 삶은 편견과 관념이 지배할 수 있는 위험성이다. 해달이 밝은 이면에 숨은 ‘아픔’을, 강물의 흐름 속에 숨은 ‘소리침’을, ‘바람의 구원소리’를 전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우리 삶의 비애를 제시한다. 또한 수박의 속맛을 아는 등 관능적인 감각에는 익숙해도 매일을 집중하고 안주하며 사는 삶의 단순함이 가져오는 행복에 눈이 어두운 슬픔도 제시한다.

시는 현상적 인식에 총명하지만 삶의 본질성에 지혜가 부족한 현대인의 삶을 꼬집고 있다. 이 시의 상직적의미는 나름대로의 깊이를 지향하지만 이미지의 구성과 전개에서 더욱더 다양하고 풍부하며 폭넓게 전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깊이 속에/ 자신을 잠궈보는/ 미묘한 선율// 올올이 명주실 뽑아내는/ 진한 그리움에/ 비낀 연분홍 노을// 전생을 우려내는/ 홀홀한 차잎/ 그 즙액의 수놓이// 비좁은 갑 속에서/ 농익혀 응축한/ 활홀한 진주// 햇병아리 부리에/ 한결 눈부신/ 착색한 서광

〈고독〉전문

언어의 절제는 오히려 언어에 많은 비중과 암시를 부여할 있다.

시는 농축된 언어의 절제성과 그에 어울리는 다양하고 고전적인 이미지로 고독이라는 의미창출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시임에 틀림없다. 이를테면 ‘명주실’, ‘노을’, ‘차잎’, ‘진주’, ‘전생’, ‘서광’ 등의 이미지는 고풍스럽고 익숙하며 그러면서도 이미지조합의 낯설기를 통해서 이 시에서 보여주는 고독의 미학을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햇병아리 부리에/ 한결 눈부신/ 착색한 서광’이란 이 구절은 이 시에서의 가장 독특하고 남다른 부분이면서 전반 시의 묘미를 구성한 부분이다. 이 시는 아름다우면서도 우아하다. 그리고 고전의 발랄한 ‘멋’스러움을 간직하였다.

  이처럼 최화길 시인의 시들을 전통적인 삶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내면에는 자연물을 빌어 정직한 삶을 구가하고 밝은 생활을 지향하는 긍정적 모습도 엿볼 있다. 더우기 <고독>, <소낙비>, <둥근달> 등과 같은 시들에서 볼 수 있듯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고전의 멋스러움을, 혹은 우리에게 익숙한 토속적인 정감을 유발하면서도 기발하고 생동한 형상적 표현들을 마주치게 된다.

물론 시인의 시에서 보여지는 이미지의 설정과 전개 상징적의미가 필자의 개인적인 시각으로 봤을 , 부분적으로 여의치 않았으며 시 또한 너무 쉽게 씌어져 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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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프로필

1977년 2월, 흑룡강성 상지시 출생

2004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석사 졸업

국내외 간행물에 다수의 논문과 평론 약간의 시작 발표. 평론 <그대와 풍경을 찾아가는 길에서>로 제39회 <연변문학>문학상 신인상 수상.

현재 산동 옌타이대학 외국어학원 한국어학과 교사로 재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