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 개혁개방 40주년기념 '녹환컵' 수필 공모 대상 수상작(2018)

 

고향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꿈을 보듬고 있었다

전향미

 



땅에 발을 깊숙히 묻은 고향, 고향은 제자리를 떠날 줄 모른다. 언제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들린 발을 가진 여자는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고, 떠돌다가 지치고 힘이 들 때 소스라치듯 생각이 나서 뒤돌아보면 고향은 항상 그 자리에서 웃어주고 있었다.

 

1987 - 여덟살 소녀, 고향은 꿈처럼 아름다웠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흑룡강조선말방송을 들으며 온 식구가 둘러앉아 점심을 먹을 때가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많이 먹어라. 더 먹어라, 먹고 픈 거 말해라."

할머니의 "먹어라"타령을 배부르게 들으며 자랐다.

교원 아버지를 둔 소녀의 집에는 책이 많았다. <고리오영감>, <등에>, <고향>, <>, <붉은 것과 검은 것> ... 소녀는 책장이 닳아떨어지도록 읽었고 서툰 솜씨로나마 독후감도 썼다.

<소년아동> 주문료를 학교에 낼 수 없었던 설음에 볏짚무지 뒤에 숨어 눈물을 훔치던 소녀, 발갛게 타오르는 저녁노을에 혼을 빼앗겨 볏짚 위에 퍼더버리고 앉은 채로 누런 마분지에 그 활홀함을 써내려가던 날도 있었다. <고향>을 쓴 이기영을 닮은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이 어슴푸레 움트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소녀의 그런 생각은 논밭의 모가 파랗게 논판을 메우듯이 조금씩 푸르렀고 조금씩 살쪄갔다.

 

1988 - 열여덟살 고중생, 고향은 꿈보다 더 아름다웠다

현성에 있는 고등학교는 천여명의 학생들이 꿈싹을 틔우는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1948년에 지었다는 흙벽으로 된 교실에는 향긋한 흙내가 코를 간질였고 화학, 물리, 정치, 역사 등 온갖 교과서 냄새가 어우러져 농촌에서 온 소년소녀들의 학구열을 부태워주었다. 기숙사에서 두 명씩 당번이 되어 물통으로 물을 길어 나르던 정경, 4층짜리 교수청사를 짓는 작업장에서 벽돌을 메나르던 풍경은 꿈을 잉태하고 꿈을 키워가던 청춘의 한 페이지에 정히 소장해놓았다.

교정 변두리에는 청춘들의 숨결을 머금은 돌배나무 한그루가 봄이 되면 어김없이 몸을 풀고 하얀 뱃꽃을 피우군 했다.

눈 덮인 교정에는 사랑과 꿈이 있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문학동아리를 묶어 백설이라는 필명으로 시를 긁적였고 현성의 어느 잡지에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학지원서에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의학원을 적어넣었다. 문학과 의삭은 할글자 차이, 서로 닮은 꼴로 고상한 직업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의학과 문학의 만남"이라는 세미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지금 돌이켜보면 명지한 선택이 아니었던가 싶다.

고향 시가지에서 5년 동안의 의대생활, 청춘의 고민은 컸다. 병을 보다가 환자를 죽일 것 같은 불안감, 뭔지 모를 부족함을 향한 괴로움, 사랑에 대한 두려움, 졸업후 분배에 대한 막연감...

그럴 때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 적어준 "저기 저 백설의 세계에로 꿈의 눈덩이 힘차게 굴려라..."라는 글귀를 보며 힘을 냈던 시절도 벌써 이십여년전의 일이 되었다.

대학 졸업시의 일기에는 "내 꿈은 명의가 되는 것이다"라고 씌여 있었다.

 

1988 - 스물여덟 처녀, 고향은 꿈길을 헤매고 있었다

고향의 근사한 병원에 분배를 받고 의사가 되었다. 한국회사가 물밀듯이 들어오던 때였다. 친구의 손짓에 천진으로 진출한 남자는 도시생활을 고집했다. 대도시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자를 따라 도망치듯 떠나는 여자를 고향은 말리지 않았고 새벽기차를 태워 떠나보냈다. 천진에서 젊은 여의사의 병원취직은 쉽지 않았다. 길 없는 길에서 서성이며 모진 방황을 거듭하고 있을 무렵, 우연히 눈에 들어온 번역직 구인광고에서 삶의 방향을 다시 한번 틀었다. '번역가는 문학가라고 할 수 있다'는 유사성을 찾아냄으로써 새로운 직정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의학-문학- 번역이라는 끈끈하게 맞물린 하나의 톱니바퀴가 삶의 수레를 옹위하여 주야장천 굴러기기를 바랬다.

"번역 일은 노가다보다 힘들다"는 의미를 뼈속 깊이 통감하는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일터에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짜릿한 성취감과 재창작의 희열이 수시로 가슴을 설레이게 했다. 잡지사 번역작으로부터 자영업 번역센터 책임자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밤샘작업을 소화해냈다. 납기 준수를 위해 1 1초가 전쟁과 다름없었고, 연속 사흘밤을 새운 날들도 있었다면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

젊은 날의 일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정받는 번역사가 되리라. 번역의 정상에 오르리라."

 

2008, 서른여덟 젊은이, 고향은 꿈길을 달리고 있었다

한국 무연고 방문취업제 제1회 혜택자로 되어 출국의 길에 올랐던 3년은 현명한 선택이었고 축복이었다. 두문불출하면서 컴퓨터를 끌어안고 몸을 혹사시키던 수년간의 틀에 박힌 생활패턴이 삶의 한자락이었다면 좌충우돌 부딪치는 새로운 삶의 형태에서 세상살이를 느껴가는 일상은 또 다른 생의 현장이었다. 남편에게 휘둘러 끌려갔던 창업도 번번히 실패로 끝났지만 안온한 삶의 멍에를 벗어보려는 야심찬 도전이었고 앞으로 살아야 할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었으니 후회 없는 감동으로 남는다.

이 모든 것들이 글쓰기를 위한 준비와 축적이었을까. 생업에 집중하는 동안 그들먹이 차오르는 그 어떤 느낌들이 감성과 의식을 사정없이 두드려댔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은 가슴은 어느새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고향마을 앞뒤로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 벼이삭 출렁이는 계절이 오면, 보일듯 말듯 뻗어있는 논두렁길을 걸어보는 재미에 푹 빠졌던 어린 시절이 하필 집요하게 떠오른다. 어깨를 치는 벼이삭 사이로 삐뚤삐뚤 한들한들 그렇게도 걷고 싶었지. 논두렁길에서 아스라하게 동경하던 작가의 꿈이 눚깍이 문학도에게 진지하게 성큼 다가선 것이다.

이 무렵의 일기는 이렇게 쓰고 있었다.

"치열하게 쓰라. 쓰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2018 - 마흔여덟 중년, 고향은 꿈처럼 다가왔다

오십 고개를 앞에 두고 뒤를 돌아보니 고향이 정겹게 웃고 있었다.

아득히 멀어져간 줄 알았던 고향이 가까이 존재해 있음에 울컥하는 감동을 받는다. 고향은 꿈의 무대를 찾아 떠나는 자식을 말리지 않았고, 원망도 하지 않았다. 혹여 돌아오는 자식이 집을 찾지 못할까 걱정되어 색 바랜 모습 그대로, 낯익은 모습 그대로, 쇠잔해진 그대로 고즈늑히 땅을 지키고 엎드려 있다. 개선가를 부르며 돌아오든 병약한 몸으로 돌아오든 말없이 품어주기만 할 뿐이다.

고향이 고향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고향이 주는 넉넉함과 너그러움과 한결같음이 몸통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원인에서일 것이다.

땅에 뿌리를 박은 고향은 제자리를 떠날 줄 모른다. 그래서 타향살이 인생이 불안하지 않다.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어 타향에서 힘찬 날개짓을 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오늘의 일기장에는 이런 글자가 씌어진다.

"돌아가자 고향으로. 한번도 떠나지 않은 것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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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미 프로필

1971년 11월 길림 서란 출생

1996년 장춘중의학원 졸업

2013년 “연변문학”에 처녀작 “바다와 중년의 그리고 친구” 발표.

흑룡강신문 개혁개방40주년기념 “록환문학상” 수필 대상, 제3회 "애심성컵" 전국조선족녀성 생활수기 가작상, ≪동포문학 3호≫ “안민문학상” 수필 우수상, 한국산업인력공단, 한국법무부 외국동포 수기 우수상,

현재까지 수기, 수필 소설 다수 발표

연변작가협회 회원, 청도작가협회 부사무국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