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연변작가협회 청년문학상 소설부문 동상 수상작(2019년)



중편소설

그대안에서 뛸게요

이홍숙

 



1.

회장님, 요즘 80후작품특집을 낸다고  잡지사에서 아우성인데 80작가들이 있어야지요. 글쎄 이 세대가 이렇게 드물다니, 참 어디서 물색을 해와야 될지 대책강구를 빨리 해야 될거 같은데요.

그러게. 근래 상황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자네까지 이렇게 다그치면 내속은 재가 되네. 우선 신세대 인재가 어디서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보게나.

어제도 네이버까페에서 인터넷글을 쓴다는 작가지망생을 만났는데 당돌해서 내원, 뭐 자유분방한 문학을 추구한다면서 거부를 하더군요. 잡지사에 투고를 하면 몇달이나 기다려야 되고 밤새우며 작업한 작품들이 존중을 받지 못한다면서 그럴바엔 공감과 피드백이 즉시 이루어지는 온라인창작을 택하겠다는거죠잡지사들도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간신히 목숨부지를 하고 있는데…“

우에서는 빨리 내라 재촉을 하지, 원고 마감일은 다 되가는데 아예 가능성이라고 안보이니 참나.

어쩌겠소. 인터넷을 포함한 포털사이트에 공고를 내고 위챗 계정에도 소식을 게재하는게 어떻겠소. 아니면 원고료를 20프로 인상을 하든가…”

젊은층이 안본다니 문제가 아니요.

일단 포박해오기만 . 자유분방한 태도가 문제라면 내가 직접 나서서라도 설득을 하고 키워볼테니까.

최근들어 문학지와 협회에서는 특집 고안을 하느라 신경을 도사리고 있었.여러분야 지성인들이 모여 우리 문학살리기 캠페인을 진행하기로 했는데 그게 바로 8090특집기획이였다.민족의 작가양성은 70세대에 와서 멈추고는 더이상 진전이 없었다. 문단에서70세대까지는 재능있는 작가를 대량으로 배출을 해냈지만8090 세대에 와서는 인재발굴이 되지 않아 최근 문단에서 큰 시름거리로 앓고 있는 부분이였다. 문학은 민족교육과 직결이 될뿐만아니라 력사의 무대에서 길이길이 빛날려면 작가양성이 필수이고 그전에 먼저 이루어져야 될 사업이 바로 인재발굴이였다.한시급히 인재발굴작업에 착안해야 될 시점이다. 담배연기로 찌든 사무실안에서 각자 대책을 강구하느라 시끌벅적이였다. 그중에는 문학지중에서 제일 문턱이 높다는 HM잡지사 송우경 편집도 끼여 있었다.

오빠는 이렇게 진지해.  장난으로 끄적이는건데?

문학이 장난이야? 그건 독자에 대한 모독이야.

거창한거 필요없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하는거야.

진지해진 송우경의 표정에 그녀는 익살스레 웃더니 그를 향해 한쪽눈을 찡긋했다.

항상 장난으로 끄적인다고 습관처럼 뱉어내던 그녀는 한편의 작품을 마무리할 때마다 며칠씩 앓아누울 정도로 글에 대해 엄청난 열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한편을 써내는  장난처럼 쉬웠지만 작품에 대한 사랑은 무엇으로 막아낼  없을 정도로 뜨겁고 진지했다. 그렇게 문학을 뜨겁게 사랑하던 감성적인 그녀는 이제 그의 옆에 없었다.

특집기획소식을 듣고 혹시 잠적했던 그녀가 나타나지 않을가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송우경편집은 은근히 신경을 기울였다.

같은 시각, 협회사무실에서 허국장은 주위에서 북적이는 소리를 들으며 담배를 길게 한모금 빨았다 허공중에 내뱉었다. 답답함이 엄습해온다.

   문득 메세지 도착알람소리에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안해의 주문이 와있었다. 오늘이 마침 딸애의 생일이라 퇴근하고 오는 길에 꽃방에 들려 예쁜 꽃다발을 안고 오라는 부탁이였다. 졸업을 앞둔 딸애는 요즘 졸업식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안해와의 관계는 다 식어버린 커피처럼 랭랭하기 그지없는 사이였지만 둘은 리혼소송중에도 청춘기에 들어간 딸애가 혹시 방황을 하지 않을가 비밀에 부치고 있는 중이였다. 사무국장에 협회 회장까지 꿰차고 분야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린 허국장으로서는 외계의 시선때문이라도 절대 외설이 안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행여나 딸애와의 약속이 늦어질가 허국장은 부랴부랴 옷을 껴입고 꽃방으로 향했다.

최근 집근처에는 아주 아담한 꽃방이 하나 생겼다. 작은 정원에 둘러싸인 정취가 넘치는 꽃방이였는데 그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수 있는 널직하고 큰 창가에 걸어놓은 네모난 박스등에 늘 그날그날 꽃방 주인의 기분을 나타내고 있는듯한 감성묻은 시구들이 즐비하게 메모되여 눈길을 끌었다.

어서 오세요

서른쯤 되여보이는 피부의 아가씨가 조곤조곤 속삭이는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딸애 생일에 꽃다발입니다.

말이 끝나기 바쁘게 현란한 손놀림으로 장미의 가시를 제거하고 작약과 리시안셔스와 함께 한아름 묶어 리본까지 세팅하는데는 불과 10여분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도 박스등에는 예전과 같이 감성이 흐르는 시구가 메모가 되여 있어서 허국장은 저도 몰래 그쪽으로 눈길이 갔다. 그가 예쁘게 포장된 꽃다발을 받아 안고 문을 나서려던 순간이였다. 포장선반우에 올려놓은 휴대폰이 부르릉거렸다. 꽃방 주인이 어디에선가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소곤거리는게 들린다.

저기 죄송한데 저는 다시 글을 생각이 없습니다. 하는 일이 좀 많아서요. 죄송합니다.

문을 나서려던 허국장은 녀인의 대답에 고개를 홱하고 돌려 꽃방주인을 주시해 보았다. 어두운 불빛이라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손을 부지런히 놀리는 걸 봐서는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듯 해서 말을 걸 수 없었다.

 

2.

허국장이 아쉬운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간 꽃방안에는 주인 진이만 홀로 남았다. 아침부터 손님이 줄창 밀려들어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생화들을 포장하고 있지만 마음은 어느새 다른 공간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안것인지 모르지만 얼마전 작협 기획부에서 연락이 작품특집 고안을 하는데 80후 세대 모임에 참여할 수 없냐는 건의를 해왔다. 온라인사이트에 등록했던 글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진이에게 있어서 문학은 가슴이 터질 열정이 타오를 그것을 맛있게 료리하여 작품을 빚어내는 것이였고 말하자면 일종 세상과의 대화였다. 가슴이 시키는대로 사이트에 글을 올렸을뿐인데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팬클럽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청춘사이트 베스트 1위를 꿰차며 몇년동안 고공행진을 했었다. 그렇게 가슴 뛰는 일을 그만둔지 이미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진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찍어내며 창가 흔들이 의자에 앉아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미 멈춰버린 심장을 아무리 심페소생술을 한다고 해도 다시 뛸지는 미지수이다. 그리고 화약냄새가 탁하게 풍기는 질투와 시기 분쟁의 문단에 다시 발을 들여놓고 싶은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다.

창밖에서는 비가 투덕투덕 내리고 처마밑에 물방울이 똘랑똘랑 떨어지며 남다른 운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진이는 비오는 날을 특히 좋아했다. 비오는 창가에 앉아 촘촘하게 내리는 비를 감상하는 것은 더없이 신나는 일이였다. 박스등에 어제 썼던 시구를 지워버렸다. 오늘의 기분은 스마일이다.

시간대에 허국장은 컴컴한 서재안에서 전비서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모조리 잡아오라고 하지 않았나. 잡아오기만 해.

셋은 대충 섭외를 해놓았는데 지금 한명이 부족합니다. 네명이여야 되는데

어떡하든 방법을 대봐.

후보 한명이 있긴 한데 전화를 여러번 걸었지만 글을 안쓰겠다고 하는 바람에......

거기가 어딘가? 위챗으로 위치 공유하고 신상정보 보내게.

전비서는 간들간들하게 몸숨줄만 붙어있을뿐이지 언젠가는 나약한 목숨줄이 끊어질거 같다는 위태로운 생각이 드는 요즘이였다. 그 잘난 8090특집이 뭐길래 이렇게 자존심 싸움을 해야 되는지 도저히 리해가 되지 않았다.

협회에서 이번 특집작품을 내기 위해8090작가들을 섭외하는데 젖먹던 힘까지 쓰는 판이다. 남은 시간은 석달, 이미 섭외한 사람은 고작 세명, 아직 한명이 부족한데 솔직히 피가 마르는 기분이였다. 말하자면 유력한 후보가 한명 있긴 하다.

청춘이라는 사이트에서 웹소설을 읽고 있는 친구가 소개시켜준 작가였다. 친구말로는 온라인상 발표한 작품이 몇백편이 되고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실력파라는데 그렇게 온라인사이트 블로그를 휩쓸며 베스트 1위를 차지하던 작가가 긴 시간동안 잠적을 해버렸다.

사이트쪽을 연락한 겨우겨우 연락처를 얻어내 전화를 하고 방문도 했었다. 허나 청초한 얼굴에 초점 잃은 눈으로 전비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녀인이 다시 글을 생각이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을 해왔다. 글을 쓰지 않겠다고 너무 힘주어 말하는 태도에 겁을 먹긴 했지만 온라인상 쓴 글을 봤을 실력이 꽤나 있는 작가임이 분명했다. 연거퍼 몇번이나 전화를 걸어 권면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변함없었다.

제기랄. 한번이라도 응해주면 안되냐고. 비서직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정말.

계속 빌붙자니 너무 실없이 보일 같아 주저하고 있는데 허국장이 마침 전화를 걸어왔고 그가 직접 나서 섭외를 해보겠다고 하니 잠시는 멘탈이 진정될 같았다.

 

3.

아직 해볕이 따가워서 완연한 가을이라 하기에는 애매하게 날씨가 무더웠다.

이른아침, 허국장은 기상을 하기 바쁘게 자신의 평론집과 소설집 두권을 끌어안고 마당꽃방으로 직행했다. 엊저녁 전비서가 위챗 위치공유를 했는데 허국장은 그 위치가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임을 확인하고 한번 놀랐고 그 마지막 후보가 자신이 가서 꽃을 주문했던 꽃방주인이라는 사실에 다시한번 놀랐다.

주인님 계십니까.

허국장은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인기척을 크게 냈다. 인적이 없는듯 고요했는데 가스레인지우에 커피주전자가 쌩쌩 소리를 내며 벌렁벌렁 끓는 걸 보니 먼곳에 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담하게 꾸며진 꽃방내부를 둘러보다 허국장은 저도 몰래 시구가 자주 적혀있던 박스등으로 시선이 갔다. 제목은 가을비였고 필명은 투구꽃으로 되여있었다. 문단의 베테랑인 허국장은 짧은 시구에서 주인의 취향과 내면세계를 읽고 있었다.

누구......세요.

박스등에 시선이 빼앗겨 사색에 잠겨있는데 조곤조곤 속삭이는듯한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생화를 한아름 안은 녀인이 눈이 올롱해서 허국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초점 잃은 눈빛이다.

. 저는 허수철이라고 합니다. 혹시 박수진씨 되시나요?

허국장의 물음에는 대답할 의향이 없는듯 녀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바닥에 비닐을 깔고 우에 생화를 내려놓더니 가시 치는 집게를 꺼내 익숙한 솜씨로 장미의 가시를 쳐내고 있었다.

박수진씨 맞죠...

두번의 물음에도 녀인은 가타부타 말이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장미 한단을 처리한 뒤에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집게와 가위를 내려놓더니 물이 벌렁벌렁 끓고 있는 커피 주전자를 탁자우에 올려놓고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다.

한잔 드릴게요.

이야기를 나누자는 의향으로 들려 허국장은 창가에 있는 원목탁자에 의자를 빼고 착석을 했다.

녀인은 차와 다과를 내오면서도 아무말없이 조용했다.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록차 두잔을 탁자우에 올려놓고 의자를 빼니더니 허국장의 맞은켠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말문을 먼저 연것은  녀인이였다.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낯선 사람을 앞에 앉혀놓고 꺼낸 첫마디가 어떻게 이름을 알았냐니 허국장은 무안해서 갑자기 말문이 턱하고 막혀버렸다.

알면 안됩니까. 좀 알고 삽시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보느라 밀어부친 말이였는데 순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인이 머리를 들고 허국장을 바라보았다. 맑은 눈망울에 오똑한 코날, 이목구비가 오목조목했는데 어딘가 모르게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녀인이였다. 더욱이 허공을 바라보는듯한 초점 잃은 눈빛에 허국장은 순간 찬바람이 휭하고 가슴을 훑고 간듯한 서늘한 느낌이였다.

이름은 관심이 있으면 알수 있는 부분이고 그건 각설하고 중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우리 협회에서 8090작품특집 고안하는데 우리 전비서가 올려온 리력서를 보니 사이트에서 많은 글을 쓰셨던 분이시더군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번 작품특집 참여하실 의향이 없는지 해서요.

녀인은 계속 허국장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좀전보다도 굳은 표정이였다.

아니요 전혀요. 그 일이라면 벌써 여러번 전화를 걸어오셨으니 그냥 가세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몸을 돌렸다. 자리에 착석하여 차 한모금 마시는 사이 이런 축객령이 내려지다니

허국장은 허구픈 웃음이 나왔다. 작품집을 몇개나 냈고 신인육성뿐만 아니라 모든 장르를 다 휩쓸며 상을 탄데다가 국장자리 협회 회장자리를 꿰차고 있는 허국장에게 감히 이렇게 푸대접을 하는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

아니, 내가 이런 말은 안할려고 그랬는데 상대방이 말을 끝내기도전에 등을 돌리는 건 무슨 뜻입니까? 그런 의향이 있냐고 물어본 것뿐인데.

심장이 잠을 자고 있어서요.

등을 돌리고 수걱수걱 바구니에 꽃을 꽂던 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런 무책임한 사람이 한때는 문인이였다니? 등단을 안했으니 문인이라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그래도 우리말로 사이트에서 글을 썼다고 하니 문인이라고 칠 수는 있다. 허나 별 감정없이 건조한 그 한마디에 허국장은 알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라 버럭했다.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습니까? 민족애는 있구요? 그럼 5년전에는 어찌 그렇게 뜨겁게 자기표현을 하셨는지요? 한세대를 대표하는 사람이 이리 책임감이 없이 잠을 자고 있다니 우리 민족문단 실태를 안다면 그런 얘기 절대 못합니다. 본인도 뜨거운 피가 흐르는 문인중 일원 아닌가요. 갖고 있는 재능이 있는데 그것을 감춰놓고 산다는 자체가 사명감이 결여된 겁니다. 잠을 자고 있는 심장은 깨우면 됩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민족애가 남다르고 문학을 신앙으로 간주하는 허국장은 8090작품집을 고안하면서  요즘 세대들이 참 당돌하고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모집을 해보면 사이트에서 취미삼아 자유글만 끄적이고 있는 젊은이들이다. 글깨나 쓴다고 해서 문단 등극을 권면하면 자유문학이니 로맨스 소설이니 자유분방한 정신세계를 온라인 공간에서 마음껏 펼쳐보겠다며 주장을 하는데 민족문학의 선구자의 립장에서 바라보면 참 허구픈 웃음이 나오는 요즘이였다. 하긴 80후 세대부터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이주하여 삶을 영위하니 리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과연 요즘세대들이 제대로 문학이라는 걸 알고 민족애를 지니고 있는게 확실한지 의구심이 자꾸 짙어지고 있었다.

헌데 마침 80후의 일원인 이 인과 마주하는 순간 상대방의 무책임한 태도에 전에 만났던 사람들과 동일시가 되며 며칠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입술을 비집고 끈적하게 흘러나왔다. 헌데 가감없이 유감을 표하는 허국장의 모습에 알릴듯말듯한 엷은 미소가 인의 얼굴을 스쳐지나고 있었다.

제가 그렇게 해야 됩니까. 저를 잘 아십니까.

당돌한 인의 한마디는 아예 허국장의 혹시나라는 기대를 싹둑 잘라먹어버렸다. 짜증이 버럭 난 허국장은 체념을 한듯 손을 저으며 몸을 돌렸다.

안봐도 비디오입니다. 뭐 더이상 할 말이 없으니 그만 갑니다.

문을 나서면서 허국장은 탁자우에 올려놓은 작품집 두권이 생각났지만 다시 돌아갈 용기가 없어서 털썩이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어차피 상관이 없었다. 심장이 잠을 자고 있다는 사람 굳이 깨울 필요가 없는듯 보인다. 그리고 문학이라는 걸 아예 모르고 자기가 속해있는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면 작가로 데뷔를 하더라도 싹수가 이미 노란 사람이라 별 볼일이 없을 것이다.

아침부터 사람 잡는 기분이다. 묘하게 신경을 자꾸 거스르는 녀인이였다. 허국장은 문을 나서면서 거친 두손으로 얼굴을 힘껏 부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4.

...죄송합니다만 아직 작가 한명이 섭외가 안된 상황이라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담배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사무실안에서 허국장이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담배를 두갑째 태우고 있다. 이번 작품특집은 신인 작가를 발굴하자는 의도에서 시작했지만 선의적인 경쟁을 전제로 하기에 각 협회마다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조바심을 끓이고 있던차였다.

시에서는 연락이 와서 빨리 추진을 하라고 닥달인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인수를 채우기에는 글러먹은 립장이다. 8090후 작가들 리스트를 꺼내 스캔해 보았다. 딱 한명만 더 있으면 되는데 뭐도 약에 쓰자면 없다더니 이거야말로 진정 머피의 법칙이 분명했다. 며칠 속을 끓였더니 요즘 두통이 심해진 듯 했고 가슴쪽이 막혀버린 듯 자꾸 갑갑해졌다.

저기 국장님, 누군가 뵙자고 찾아왔는데요.

전비서가 종종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서며 전해주는 말이였다.

누구신가?

머리를 숙이고 있어서 보진 못했는데 저번에 섭외하려고 했던 마지막 후보 같기도 합니다. 꼭 뵙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마지막 후보라는 한마디에 허국장이 눈이 번쩍 띄여서 고개를 들고 호령했다.

당장 들어오라고 하게.

얼마후 사무실문이 빼꼼히 열렸다. 곁눈질로 보니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캐쥬얼한 옷차림에 커다란 에코가방을 든 인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하더니 발볌발볌 다가왔다.

허국장을 찾아온 것은 마당꽃방의 주인이였다. 전비서에게 시켜서 커피 두잔을 내오는 동안 허국장은 그녀를 눈박아 보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발아래만 내려다 보며 숙제를 다 못해온 학생처럼 쭈밋거리는 행동이 며칠전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잠자는 심장이 겁니까.

허국장은 꽃방에 찾아갔다 기분 잡치는 일을 겪은게 생생하게 떠올라 온도가 묻어있지 않는 말을 텁게 건넸다.

온기없이 싸늘했던 표정, 당연히 그날처럼 엄동설한 찬바람 쌩쌩 부는 소리가 새 나올 거라고 짐작했었는데 앉아있던 인이 의외로 살짝 눈웃음을 짓는 것이였다. 그녀의 눈이 어느새 반달처럼 휘고 있었다.

그럼 아직 깨어나지도 않았는데 찾아오셨습니까. 심장이 잠을 잔다는 사람이랑 이야기를 나눌수 있을 정도로 저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허국장의 따져묻는 한마디에 잠자코 있던 인이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탁자우에 놓고 가신 작품집 보았습니다. 덕망이 높으신 분인데 제가 우리 민족 문학작품을 안본지 한참이나 되여서 알아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선배님이시라면 잠자는 심장을 깨워줄 수 있을 거 같아서 렴치불문하고 찾아왔습니다. 가르침을 꼭 받고 싶습니다.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자신의 의사표명을 조곤조곤 정확하게 해오는 인을 보면서 허국장은 요즘 신세대들이 엉뚱하다 못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잘 아냐고 왜 그래야 되냐고 당돌하게 질문을 던지더니 그 사이 또 생각이 달라져서 이렇게 사무실까지 찾아왔다. 한참동안 사색에 잠겨있는 허국장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던 녀인이 커다란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 꺼내 탁자우에 올려놓았다.

제가 5년전에 썼던 글입니다. 온라인 사이트에서는 인기몰이를 했던 두편의 글인데 별로 만족스럽지는 못합니다. 선배님께 예리한 해부 부탁 드리러 왔습니다.

제가 그렇게 해야 됩니까.

허국장은 꽃방을 찾아갔을 녀인이 했던 당돌했던 말투 그대로 되물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얼굴에 분명 알릴듯말듯한 미소를 걸고 있던 녀인은 말문이 막혔는지 아무말도 없이 잠자코 앉아있었다.

좋습니다. 글은 내가 봐드리지요. 근데 나한테도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으면 계약이 성사됐으니 글을 봐드리는거로 하고 만약 안된다면 더이상 거론하지 맙시다.

단호하게 내뱉는 허국장의 말투에 조금 망설이던 녀인이 머리를 살짝 끄덕였다.

. 그럴게요.

이번에 우리 협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8090특집 참여하세요. 이따 위챗 그룹 QR코드를 보내줄테니 추가를 하고 그 우에 있는 주소대로 작품 몇편 잘 고안해서 보내세요. 약속합시다.

진이는 나지막하게 대답을 했다. 그렇게 대답을 한 뒤 급급히 사무실을 나섰다.

 

5.

시뿌옇게 흐렸던 하늘, 서쪽에서부터 어느새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비가 쏟아 지려나보다. 불현듯 또다시 현승우 그 사람의 얼굴이 물우에 기름처럼 번들거리며 징그럽게 떠올랐다.

이러셔. 내가 당신을 위해 신경 쓴게 어딘데 나한테 이럴 수는 없지. 안그래?

뺨을 맞은 현기자가 이발을 부드득 갈며 미친듯이 진이에게 달려들었다. 호텔 객실안에서 진이는 현기자와 치렬하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좋은게 좋은 거라고 앙탈 그만 부리지 그래. 녀자들은 좋으면서 안그런척 한다말이야. 흐흐

꺼져. 당장 꺼지라고. 미친넘.

미친넘? 통통 튕기는게 원래 더 끌리는 법이긴 하지. 그래서 내가 투구꽃 당신에게 미쳐있는게 아니겠어. 좋은 말로 할 때 내게 와. 빨리.

현기자가 손을 뻗어 진이의 머리채를 잡고 땅에 내동댕이치더니 굶주린 늑대처럼 털썩이며 덤벼들었다. 블라우스 단추가 튕겨나가고 스타킹이 찢어져 새하얀 허벅지가 눈을 자극하자 더더욱 리성을 잃은 짐승마냥 몸 곳곳을 더듬기 시작했다.

팬미팅때 윤소율이 권한 음료수가 화근이였다. 음료수로 가장한 그 액체에는 분명 알콜이 섞여있었다. 진이는 입술과 혀가 뻣뻣해지고 눈앞이 아득하게 흐려와 정신을 차려보느라 안깐힘을 써봤지만 점점 몽롱하게 눈앞이 얼른거렸다. 피부에도 울긋불긋한 반점들이 돋아나고 호흡곤란 증세가 오는 것인지 숨이 턱턱 막혀왔다. 이러다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진이는 절망에 빠졌다.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마냥 두뺨을 적시고 있었다

조각조각 떠오르는 기억에 진이는 란간을 짚고 휘청이는 몸을 겨우 가누었다.

잠자고 있는 심장은 깨우면 됩니다.

사실 그날 오후 일을 하는 내내 남자의 말이 머리속에서 맴돌고 있었고 마음이 어지럽혀져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가시 치기를 하다 몇번이나 장미가시에 찔려 손가락이 피 범벅이 는지 정신이 집을 나가버렸나보다.

생화 정리후 진이는 밴드로 상처자리를 처치한 탁자에 마주앉았다. 아무래도 생각을 좀 정리해야 될듯 싶었다.

남자가 문을 나선 보니 탁자우에는 두권의 책이 놓여 있었는데 한권은 평론 한권은 소설이였다. 작가는 허수철이라고 적혀 있었고 프로필에는 대단한 학력뿐만 아니라 문단경력과 수상기록 10여차례 내용으로 아주 화려하게 장식이 되여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한가해지자 그 남자가 남겨놓은 작품집을 대충 뒤적거려보았다.

진이는 자신의 권력과 배경, 지식에 관한 자기자랑과 자기 어필이 넘치는 세상, 어디 가서든 자기소개마저도 화려한 경력으로 도배하는 이 세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목숨이외의 것에 집착하고 늘 전전긍긍하는 속세의 사람들과는 아예 동떨어진 세상에 살고 있는듯 조용히 지내왔다.

  앞부분 표지에 적혀진 화려한 경력으로 도배한 프로필을 보면서 사람 역시도 인간 속세의 속물이라고 생각을 했을뿐이였다. 허나 책을 펼치며 남자의 인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들어있는 솔직하고 소신있는 작품을 보면서 진이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듯 저도 몰래 탄성이 흘러나왔다. 무궁한 에너지를 돌돌 말아 반죽하여 정교하게 빚어낸 작품은 느낌으로 말하자면 마치 거품을 싸악 걷어낸 아이스라떼처럼 시원하고 담백하게 느껴졌다.

자리에 줄곧 뿌리를 박고 앉아서 오후내내 남자의 작품집 두권을 샅샅이 읽어보았다. 그의 글에는 박해진 인정세태를 사정없이 꼬집는 글이 있는가 하면 탁해진 세상을 마주하면서 시야가 흐린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었고 또 세상을 힘들게 살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사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작품평론에서도 듣기 좋은 미사려구를 화려하게 늘어놓기보다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분석을 해 간단명료하고 조리정연하게 약한 고리들이 잘 정리되 있었다. 그의 글을 보며 진이의 마음속은 글쓰고 싶은 충동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기대하는 마음으로 사무실을 찾아간 것이였다. 그때서야 눈앞에 앉은 남자를 자세히 볼 수가 있었는데 40대후반정도 되여보이는 중후한 멋을 풍기는 남자였다. 뚜렷한 오관, 예리한 눈빛, 그리고 소신있게 정확하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적극적인 제스처는 한눈에 봐도 성격이 올곧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진이 눈앞의 남자는 그가 쓴 글을 통해 느꼈던 느낌과 일치한 분위기를 풍겼다.

사실 진이가 그토록 좋아하던 글을 그만두게 것은 리유가 있었다. 마냥 가슴이 벅차올라 그것을 글로 표현해보자는 의도에서 열정 하나로 시작을 했었는데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진이가 글에 대한 일부 독자들의 비뚤어진 시각은 글에 대한 열정만으로 이겨낼 있었는데 사이 슬럼프가 왔고 글을 정확히 알아보고 해석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절망에 빠졌었다. 거기에 더해진 결정적인 한타는 바로 그때 진이에게 덮쳤던 그 끔찍한 악몽이였다. 악몽의 기억이 또다시 어두컴컴한 모퉁이에서 스물스물 기여나오자 진이는 식은땀이 나고 현기증이 심하게 몰려왔다.

 

6.

내가 투구꽃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흐흐, 당신 뜨게 한 것도 내가 아니겠어. 나 그런 능력 있는 사람이야. 사이트뿐만 아니라 지면잡지에서 뜨게 할 수 있지. 당신 하는 거 봐서.

몽롱한 의식가운데 현승우가 셔츠단추를 풀어젖히고 웃몸을 드러내는게 보였다. 진이는 빨리 일어나 도망을 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이미 알콜알레르기 증상으로 인해 마비가 온 몸이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는다. 입술과 눈두덩이가 부풀어오르고 열이 오르고 있는건지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려오고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현승우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로부터 , 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고 있어 소름이 끼쳤다. 단추가 튕겨나간 블라우스를 반쯤 벗겨내고 몸을 더듬던 현승우가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벨트를 풀고 있었다.

그때였다. 터벅터벅 발자국소리가 들리는듯 하더니 호텔의 초인종이 때마침 울리고 있었다. 벨트를 풀다 만 현승우가 짜증이 섞인 어투로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진이를 한쪽으로 내동댕이쳤다. 그가 옷매무시를 대충 추스리고 방문을 여는 순간, 진이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현승우를 밀쳐내고 휘청거리며 호텔 로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카운터에 서있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온다. 그뒤로는 호텔경비인원들이 놀란 눈으로 멀뚱멀뚱 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저 좀 살려주세요...

5년전 그 끔찍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진이는 미간을 찌프린채 양철통을 뒤집어쓴듯한 아픈 머리를 감싸안았다. 탁자우에 놓여진 두통약을 꺼내 입에 털어넣고 눈을 감고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글을 사랑하는만큼 많이도 방황했었는데 이제 글을 봐줄만한 사람이 생겼다. 옳바른 인생관과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이 사람이라면 반드시 작품의 부족한 부분을 알고 제대로 짚어줄거라 진이는 왠지 모를 확신이 생기고 있었다.

잠자는 심장이 난겁니까.

무턱대고 글을 봐달라며 찾아간게 실례가 됬는지 남자가 단도직입적으로 심장이 여난거냐고 물어오는데 심각한 남자의 표정앞에서 진이는 자꾸 웃음이 나왔. 말속에는 진이가 호의를 거절한데 대한 분노도 있었지만 기대가 다분하게 깃들어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남자는 8090특집을 기획하고 있으니 QR코드를 알려주며 추가하고 작품 몇편을 잘 고안해서 보내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글쓰기를 접었던 그때 과거를 들추어보며 진이는 살그머니 가슴 왼쪽 심장이 있는 곳에 손을 얹어보았다. 5년전에는 뜨겁게 타올랐던 심장, 매일매일 벅차올라 터질 것만 같았던 이 심장이 아예 동면에 들어간건지 지금은 뛰지 않고 있다.

남자가 작품을 보며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서 오늘도 사무실을 찾아가긴 했지만 막상 그의 건의대로 작품을 고안해서 보내자고 생각하니 5년 잠자는 동안 필묵이 녹슬어서 과연 재기할 수 있을지 슬그머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으로 청춘이라는 사이트에 접속을 했다. 사이트에 떠있는 5년전 써냈던 200여 편의 글들을 보며 진이는 저도 몰래 그때의 희열을 그대로 느끼는 듯 가슴이 점점 부풀어올랐다. 온라인 사이트에 썼던 글을 모두 프린터해내여 원목탁자우에 쌓아놓았다. 이제 글을 봐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니 제대로 한번 모터작동모드로 진입해야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7.

시각 허국장은 진이가 두고 두편의 원고를 검토중이였다. 8090특집기획이 발등위에 떨어진 불이라 일단 이것부터 먼저 끄고 다른일에 전념해야 될것 같았다.

그녀를 두번 봤지만 허국장에게 인상은 초점 잃은 눈빛과 조곤조곤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말투였다.

허나 작품만큼은 그런 스타일의 그녀가 썼다고 하기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마치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 시원하게 퍼붓는 소낙비를 떠올리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인터넷 사이트에서 글을 썼다고 하니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필경 잡지사 편집들의 엄밀한 수정을 거쳐 지면에 발표되는 글과 인터넷 사이트에서 끄적이는 글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였다. 헌데 녀인의 글은 조리정연한 것도 아니고 소설틀이 짜여진 것도 아닌데 웬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하고 가슴을 뜨겁게 달궈주는 매력이 있었다.

로맨스소설과 판타지소설 두편이였는데 특히 판타지소설은 추리와 무협의 기법을 한데 묶은 글이라 각별히 눈길을 끌었다. 온라인 사이트에서 인기를 얻은만큼 전문가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문제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스토리는 촘촘히 탄탄하게 구성이 돼있었고 젊은 독자들이 선호할만한 로맨스가 가미된 글이였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신선했지만 장면구성과 마무리 부분에서 약간 더 수정을 가해야 되는 부분이 있었다. 또한 주로1인칭을 사용했거나 사투리 사용이나 단어의 반복사용, 지면 발표를 하기에는 소재가 가볍고 미흡한 틀 역시 허점이였다.

한참 소설을 뜯어보고 있는데 전비서가 총총한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국장님, 방금 JK일보사에 현기자가 뵙자고 하는데요.

현기자가 뭔가 냄새를 맡았나보군. 참 기가 막히게 타이밍을 맞추니…”

허국장은 현기자를 떠올리며 저도 몰래 혀를 끌끌 찼다. RH협회의 특집기획 진행사항을 렴탐하러 것이 분명했다. 눈에 거슬리게 신경을 자꾸 긁는 놈이다.

손님을 들이라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사무실문이 벌컥 열리더니 현기자가 얍삽한 웃음을 실실 흘리며 사무실에 들어섰다.

아이고 국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그래 오랜만일세. 바쁜 자네가 여긴 어인 연고로 발걸음을 다하고말이야.

지나가는 길에 국장님 뵙고 싶어 들렸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한잔 하실가요.

아니, 낮술은 안 마시네. 나중에 한잔하기로 하고 용건이 있어서 온것 같은데…”

허국장의 예리한 질문에 현기자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8090특집 JK일보에서도 기획을 하고 있는데 사실 제일 라이벌로 느끼는 협회가 바로 허국장이 맡아서 이끌고 있는 RH협회였다.

매년마다 이맘때면 협회에서는 선의적인 경쟁을 벌이느라 작품특집을 내군 했었는데 번마다 허국장이 이끌고 있는 RH협회는 늘 챔피언을 독차지했었다. 이번에도 역시 JK일보에서는 RH협회를 라이벌로 생각을 하고 있었고 진행사항을 확인차로 허국장의 사무실에 들렸던것이였다.

신인작가들은 섭외가 된건가요? 아, 우리 협회는 지금 큰일입니다. 아직 세명이 부족해서 말입니다. 8090작가들이 다 어디 갔는지 통 모르겠네요.

허허 그래? 그건 우리도 똑같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부분이네.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이동하다보니 문학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고 또 요즘 젊은세대들은 온라인에서 창작활동을 한다는데 그쪽으로 알아보면 더 쉽지 않겠나?

역시 국장님의 혜안은 따라올자가 없습니다. 신인작가 섭외가 쉽지 않아 고민을 했었는데 답을 찾았군요. 그래서 자주 국장님을 뵈야 될 것 같습니다.

참으로 간교한 놈이 틀림이 없다. 분명 목적이 있어서 발걸음을 했을텐데 용건은 드러내지 않은채 에둘러서 화두를 끌고 가는 것을 보면서 허국장은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RH협회에서는 신인작가 섭외가 어찌 되였습니까. 저번에 한명이 부족하다는 걸로 들었는데 그뒤에 진행이 어떻게 되였는지 해서요.

진행중이지. JK일보에서는 신인작가 몇명을 섭외했나. 이제 곧 경합이 열릴텐데 말일세.

허국장은 현기자의 눈치를 살폈다. 말로는 아니라고 빙빙 꼬면서 준비는 철저하게 하고 온 것이 분명하다.

전비서의 말을 듣자 그쪽에서도 온라인 작가 몇명을 섭외했고 그중에는 온라인에서 꽤나 이름을 날렸다는 필명이 여우비라는 윤소율도 있다고 한다. 윤소율이라면 각 협회에서 탐을 내는 신인이긴 하다. 사이트에 쓴 글이 별로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협회에서 8090특집을 기획하기 전부터 이미 지면에 네편의 작품을 내놨고 인기가 승승장구로 치닫고 있는 신인이였다.

만약 꽃방주인을 섭외하지 못했더라면 이번 경합은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녀의 글을 허국장은 왠지 알수 없지만 절로도 배짱이 두둑해졌다.

허국장의 빈틈없는 표정에 현기자는 앞길이 묘연해졌다. 뭔가를 알아내야 할텐데 이 망할놈의 국장이 틈을 내보이지 않는다. 할 일도 많은데 괜히 헛걸음했다는 생각에 짜증이 버럭 났다.

(내가 기필코 알아낼테니 좀만 기다리지.)

현기자는 속으로만 윽윽거리며 별렀지만 별수없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곧바로 윤소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허국장이 아직 신인 섭외를 더해야 된다고 말마디에 힘을 주었지만 왠지 표정을 보아하니 자신만만한거 같았고 이번 기싸움에서 밀릴 것 같은 느낌이였다. 아무래도 빨리 작품고안을 해서 수정을 거치고 준비를 단단히 해야 될거 같았다.

소율아, 준비는 어느 정도 된거야? 오늘 RH협회 갔다왔는데 말이지. 웬지 자신만만해 보이는데 허국장이 말이야. 단단히 준비해야 될거 같아. 우리쪽은 소율이 너한테 기대가 크니까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전화로 그만하고 내가 그리로 갈게.

현승우는 전화를 끊고나서 담배 한개비에 불을 붙였다. 윤소율은 필명이 여우비로서 청춘이라는 사이트에서 글을 좀 썼던 작가였다.

윤소율을 알게 것은 팬으로 투구꽃이라는 녀작가를 따라다녔을 때의 일이였다. 투구꽃과 윤소율은 함께 글을 쓰는 온라인 창작그룹에서 알게 된 문우였다. 투구꽃 그 필명을 떠올리는 현기자의 얼굴에 알릴듯 말듯한 미소가 피여올랐다. 한번 빠지면 절대 헤여나오지 못한다는 묘한 투구꽃의 향기, 아직도 입안에서는 그 투구꽃의 향기가 맴도는데 그녀는 그날 일 이후로 잠적한지 5년째이다.

투구꽃이 사라진 후에 청춘이라는 사이트에서 여우비 윤소율의 글이 뜨기 시작했고 그렇게 알게 됐던 윤소율을 8090특집을 기획하면서 협회에 가입을 시켰던 것이였다. 이번 작품특집기획이 성공하면 아마 그동안 온라인창작에 심혈을 기울이던 신인작가들이 다 수면우로 떠올라 문학지에 컬러 다양한 작품들을 내게 될 것이고 시대에 발맞춰 문학지의 풍격이 바뀌지 않을가라는 생각이 짙게 들고 있었다. 투구꽃이 있었더라면 이번 8090특집은 볼만했을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 200여편의 감칠맛이 있고 스토리가 기상천외하고 탄탄한 글들을 써내는 투구꽃이 있었더라면 상은 물론이고 문단이 들썽이는데는 시간문제였다. 허나 이미 여우비를 섭외한 마당에 투구꽃이 잠적해버린게 어찌보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현기자는 담배를 비벼끄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전화로만 거론을 할게 아니라 일단 윤소율부터 만나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8.

늦여름에서 이제 가을로 넘어가는 문턱이라 창밖에는 가을의 여운을 한껏 뿜어내는 가을비가 촘촘히 내리고 있었다. 날씨도 찌뿌둥한게 술이 바짝 땡기는 날이였다.

사무실 직원들이 모두 퇴근을 해버린 늦은 시간, 허국장은 사무실에서 나와 그 근처를 거닐었다. 다행이 전비서가 선견지명이 있어 우산 하나를 남겨두고 갔으니 망정이지 물먹은 하마처럼 후줄근해질 번 했다. 지금 이 시간쯤이면 딸애는 학교에 있을 것이고 텅비어 온기가 없는 집에 도저히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비오는 거리를 걷고 있다. 떡시루처럼 푹푹 찌던 여름이 지나가고 서늘한 가을이 다가올려는지 불어오는 바람에 계절의 향기가 흠씬 풍겨오고 있었다.  그렇게 우산을 쓰고 얼마를 걸었는지 습관이 무섭다고 계획 하나 없는 허국장의 발걸음은 어느새 집으로 향하는 길에 있었고 얼마 되지 않아 도착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녀인의 꽃방이였다.

허국장은 저도 몰래 꽃방쪽을 기웃거렸다. 멀리서부터 꽃향기가 물씬물씬 풍겨오고 꽃방의 박스등이 훤하게 켜져있어 아늑하고 정취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었다.

꽃방 내부에 불이 켜져 있긴 하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보니 잠시 외출중인가보다 생각하며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어디선가 스적스적 하는 소리와 흥얼거리는 노래가 들려오는 허국장은 귀를 바짝 기울였다. 마당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한발 다가서서 보니 꽃방의 주인 진이가 사뿐사뿐 춤을 추고 있었다. 물찬 제비와도 같이 아릿다운 자태로 유연하게 몸을 놀리며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녀의 손이 두갈래의 선명한 포물선을 그리며 아래로 아스라히 떨어졌다 날아올랐다를 반복하며 허국장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좀전까지 촘촘하게 내리던 비가 점점 기승을 부리며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녀인의 춤사위는 도저히 멈출념을 하지 않는다. 엷은 티에 롱치마차림으로 쏟아지는 비에 맞서 춤을 추는데 아름답다 못해 처절하다는 느낌마저 물씬 풍겨와 코끝이 시큰거렸다.

 쏟아지는 비에 젖은 티와 롱치마는 몸에 찰싹 붙어 몸매 라인이 훤히 드러나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조차 감지하지 못한 채 맨발바람으로 비속을 자유롭게 거닐며 코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자유녀신상을 방불케 했다. 허국장은 지금 이 순간이 마치 꿈속의 비길을 걷고 있는 듯 눈앞이 몽롱해졌다. 점점 더 세게 퍼붓는 비에 우산을 써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또 어디로 가야 되는지도 잊은 채 넋이 나간듯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주인님 계십니까?

울타리 밖에서 우산을 접는듯한 소리가 났고 수진이는 인기척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이 늦은 시간 꽃방에 꽃을 주문하는 손님이 찾아들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허국장과 눈을 마주친 수진이의 얼굴에는 아주 당황한 기색이 력력했다.

. 들어오세요.

수진이는 꽃방에 찾아든 손님에게 반갑게 응대를 하더니 곧이어 허국장을 향하여 가볍게 머리를 숙이면서 말을 건넸다.

어떻게 오셨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허국장에게 춤사위를 들킨 리유때문인지 수진이 얼굴은 발갛게 상기가 되여있었다. 손님을 안내하며 수진이가 먼저 꽃방으로 들어가고 허국장은 그대로 자리를 뜨기가 무엇해서 자리에서 서성거렸다. 시간이 흘러 손님이 꽃다발을 받아 안고 자리를 뜨고서야  허국장은 인사라도 하고 가야 될거 같아서 가게에 들어섰다.

비에 젖은 옷이 많이 신경이 씌였는지 수진이는 엷은 가디건 한견지를 그우에 걸치고 있었다. 차를 내오는 동 허국장은 가게내부를 둘러보았다. 꽃방 탁자우에는 허국장이 선물한 책 두권을 제외하고도 원고 비슷한 자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특집작품에 대한 창작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게 분명했다.

어색한 침묵을 깨보느라 허국장이 입을 열었다.

특집 원고는 열심히 준비하고 계십니까.

허국장의 물음에 수진이는 한참동안 머뭇거리더니 낮은 소리로 대답을 했다.

아직 컨셉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투고를 해보지 못해서 어떤 글이 통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문학은 언어학이고 인간학입니다. 언어로 멋진 집을 짓는 것이지요. 언어학이 우선이니까 언어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수진씨는 이미 앞서갔습니다. 저번에 갖고 오신 원고도 봤고 또 수진씨 사이트에 게재했던 글을 보고 오는 길인데 언어가 풍부하고 감칠맛나게 쓸줄 압니다. 저한테 보여주셨던 그 두편의 글에 한편 더 보태여 잘 고안해보세요.

…”

수진이는  두잔을 내와 탁자우에 올려놓고 허국장의 맞은켠에 자리잡고 앉았다.

저는 글을 평가하는 사람이니까 안된 부분만 이야기해드릴게요. 괜찮겠죠? 인터넷 글을 많이 써서 그런지 사투리라든가 필요없는 부호들을 너무 많이 씁니다. 그리고 자유분방하고 순수한 건 좋은 거지만 아직 소설의 틀을 잘 모르는 것 같네요.

아직 서로 익숙치 않은 상황에서 글에 대한 평가가 너무 예리했는지 허를 찔렀는지 모르지만 초점을 잃었던 수진이의 두눈에 순간 반짝이는 빛이 스쳐지났다.

 초면에 예리하게 지적해서 미안합니다만 몸에 좋은 약은 입에 법이라고 칭찬만 들으면 글이 늘지 못합니다. 이미 한배를 탄 상황이니까 할 말은 하겠습니다.

공격적인 허국장의 태도에 수진이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웃었다. 양볼에 보조개가 옴폭 패이고 두눈이 초승달처럼 휘는 것을 바라보며 허국장이 물었다.

웃는 겁니까?

그런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제대로 멘토를 만난 같아서요.

한정된 공간에 녀인과 단둘이 있다는 사실에 긴장해서 주절주절 늘어놓는 자신과는 달리  말만 딱딱 하는 수진이, 그녀와 마주 앉은 허국장은 긴장이 되여 자꾸 식은 땀이 스며나왔다.

투구꽃, 참 독특한 분위기의 녀인이다. 문득 진이를 뜯어보던 눈빛이 그녀 두눈과 마주치는 순간 허국장은 마음의 호수에 잔잔한 파문이 이는 같았다. 그런 허국장의 당황한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듯이 그녀가 수줍게 웃음을 짓더니 차를 덥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이였다. 수진이의 가디건이 원목탁자위에 삐죽 나온 못에 걸려 찢어지고 비를 후줄근하게 맞아 젖은 옷에 감춰져 있던 굴곡진 몸매가 훤히 드러났다.

순간 허국장은 시선을 어디에 뒀으면 좋을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한정된 공간에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것도 잠시 그녀 역시도 당황했는지 찢어진 가디건으로 다급하게 드러난 몸을 감싸고 있었는데 어디에서 긁혔는지 팔에서는 새빨간 선지피가 흘러내렸다.

아니, 피가 흐르는데…”

허국장은 깜짝 놀라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수진이의 팔을 감쌌다

 “별일 아니예요. 아직 살아있었나봐요...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서도 오히려 위안이 되는듯 낮게 한숨을 내쉬는 그녀 모습에 허국장은 알수 없는 화가 욱하고 치밀어올랐다.

살아있다는 확인할 있어서요? 그래서 아까 맨발바람으로, 것도 비속에서 춤을 춘겁니까? 피가 흐른 후에야 확인이 제대로 된 겁니까?

그녀의 진지한 눈빛에도 허국장은 또다시 처음 만났던 그날 초점 잃은 눈빛을 봤을 때와 똑같이 찬바람이 휭하고 가슴을 훑고 간듯 마음이 시렸다.

 

9.

남자가 상처자리를 처치해주고 꽃방을 나선 후에 늦게 자리에 누운 수진이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온밤 잠을 설쳤다. 누군가가 몰래 자신의 춤사위를 지켜보았다는 사실이 쑥스러워 얼굴이 자꾸만 화끈거렸고 비에 푹 젖어 온몸이 후줄근한데다가 몸에 피트된 옷을 입어 라인이 드러났던 걸 생각하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머리를 틀어박고 싶은 심정이였다.

(정신이 실성한 사람이라고 하겠지? 내가 왜 그랬을가.)

사실 저녁에 손님들의 발걸음이 끊어지자 수진이는 비오는 창가에 앉아 실국수처럼 촘촘하게 내리는 비를 감상하고 있었다. 보슬비가 촉촉하게 눈앞의 모든 세계를 서서히 적셔가는 걸 바라보며 수진이는 마음속의 묵은 때들이 조금씩 씻겨내려가는 것 같아 새로운 결심을 내렸다. 암울했던 과거였지만 이제는 용기를 내야 한다. 5년전 그날의 악몽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 문학에서 손을 떼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지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다. 냄새나는 누룩처럼 케케묵은 과거에 갇혀 이렇게 마냥 령혼없는 살덩어리처럼 지낼 수는 없는 일이고 새로운 스타트가 필요해보였다.

거추장스러운 것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촉촉한 땅을 밟아보았다. 발아래가 꼼지락꼼지락 새생명이 살아 숨쉬는 듯 간질간질했다. 진이는 눈을 감고 끝없이 펼쳐친 꽃밭을 떠올려 보았다. 향기 그윽한 꽃들이 피여있고 그우에 령롱한 이슬이 내려 촉촉한 공기가 페부에 스며든다

이슬을 함초롬히 머금은 꽃들사이로 날개 젖은 나비가 쉴곳을 찾아 나풀나풀 날개짓을 한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말라 비틀어졌던 풀들이 파릇파릇 돋아나며 새생명의 싱그러운 냄새를 풍긴다. 팔을 한껏 펼치고 세상을 한아름 가득 안았다. 이제 시작이다. 멋진 비상을 시작할 것이다. 나비처럼...

상처가 덧날 있으니 제대로 처치해야 됩니다. 그리고 비오는 날 맨발 벗고 춤추고 하는 거 좀 하지 마십시다.

상처를 처치하면서 허국장이 했던 말을 생각하며 진이는 살풋이 웃었다. 과거속에 갇힌 그 순간부터 심장이 얼어붙고 피가 응고됐을 거라 생각을 했었다. 헌데 찢어진 상처자리에서 피가 콸콸 흘러나오자 살아있다는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약방에 뛰여가 소독수와 밴드를 사와 섬세한 솜씨로 상처처치를 해줄 때도 남자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진이는 남자의 따뜻한 손길이 닿았던 밴드가 붙어있는 상처자리를 어루만져 보았다. 이제 상처자리가 아물고 흉터가 사라지고 새살이 솔솔 돋을 것이다. 허국장이 상처 처치를 해주고 꽃방을 나선 뒤였지만 그 여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그녀의 심장은 고장이 난듯 자꾸만 벌렁거렸다.

시간, 윤소율은 청춘이란 사이트에서 투구꽃이 쓴 소설을 카피해내고 있는 중이였다. 투구꽃이 그렇게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해 윤소율이 여우비라는 필명으로 소설차트를 휩쓸었다.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 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던 투구꽃이 잠적을 한 그날은 바로 투구꽃의 온라인팬들과 첫 팬미팅이 있는 날이였다.

제기랄 드럽게 재수없어.

그날 카운터에 쓰러지던 투구꽃 뒤로 셔츠를 추스리며 허둥지둥 호텔의 뒤쪽문으로 빠져나가던 현승우의 모습을 보았었다. JK일보를 거론하자치면 일보사뿐만 아니라 HM버금가는 잡지사까지 소유하고 있었고 또 량쪽 지분을  갖고 있는 현기자에게 있어서  신인작가를 뜨게 하거나 침몰시키는  식은죽 먹기였다. 헌데 투구꽃은 참말로 미련하기 그지없었다. 알콜 알레르기로 인해 엉망이 된 얼굴, 휘청이며 카운터로 쓰러지던 그날 초라하게 구겨졌던 투구꽃의 모습을 떠올리며 윤소율은 씁쓰레 웃고 말았다.

현승우를 마음에 둔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투구꽃에 대해 그토록 집착하기에 소원성취시켜 주는 척 투구꽃의 팬미팅이 있는 그날 현승우의 부탁대로 음료수에 알콜을 넣었다. 하지만 알콜알레르기로 인해 쓰러진 투구꽃을 업고 호텔에 들어가던 현승우의 뒤모습을 보면서 질투심에 두눈이 뒤집혀 호텔 웨이터를 시켜 문을 두드리게 했던 사람도 윤소율 자신이였다. 그뒤 현기자에게 부축을 받으며 호텔에 들어가는 투구꽃의 사진을 각 문학사이트에 올려 이 바닥에서 생매장을 시켜 버렸다. 세치혀에 롱락을 당한 투구꽃은 그렇게 처참한 몰골로 력사의 뒤길로 흔적없이 사라졌던 것이였다.

윤소율은 그렇게 투구꽃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싶었고 자신에게 속한 것을 지키고 싶었다.

 

10.

검붉은색 커텐이 드리워져 모던한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방안에서 윤소율은 현승우와 함께 캔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술기운이 올라 두볼이 발그레해진 윤소율은 몽롱한 불빛에 눈부시게 하얀 살갗때문인지 더더욱 요염해보였다.

이번 8090특집 제대로 한방 먹이자고. 떠오르는 새별 윤작가님.

오빠 덕분이죠.

작가되면 거하게 쏘는거다. 이번에 RH협회에서 준비 단단히 한거 같은데 뭔가 낌새가 이상해. 이번에 여러 잡지사에서 함께 진행하는 특집이고 또 특집에 상까지 더해졌으니 신경을 바짝 기울이도록 해.

식지에 담배를 끼고 사색에 잠긴 미간을 찌프리고 있는 현승우란 남자를 보며 윤소율은 설레임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였지만 자신이 맡은 일에는 놀라운 집중력을 보였고 윤소율은 오히려 그런 그가 섹시하게 느껴졌다. 물론 야한 속옷바람으로 유혹하고자 작정을 하고 덤벼드는 자신을 뭐보듯 밀쳐낼 때는 너무나 얄미운 마음에 혀를 깨물고싶은 생각이 간절했었지만 던져주는데도 덥석 물지 않는 현승우의 그 도도함이 더 마음에 들어 집착을 했는지도 모른다.

작품 세개를 준비하고 제일 승산이 있는 HM쪽에 보내도록해. 웹소설처럼 읽기 편하고 가벼운 글보다 메세지가 있고 슈제트가 있는 걸로 알지?

소설 세편을 짧은 석달동안 구상하고 완성을 한다는 그야말로 고된 고역이 아닐 없었다. 이번 작품도 만약 투구꽃의 글을 카피해온게 아니였더라면 한편 완성도 어려운 상황이였다.

기성작가들 글을 먼저 실어줘서 신인이 밀릴 있겠지만 내가 최대한 이번 작품만큼은 앞쪽으로 실어달라 할테니까 일단 그림만 만들어내도록 하자구.

그래서 이를 악물고 준비하기로 결심을 내렸다. 투구꽃의 장편소설중에 살을 에이는듯한 고통을 적은 러브스토리가 있었다. 바로 투구꽃이 사라지기전에 마감으로 남긴 글이였는데 그대로 온라인 창작소설로 끝나기에는 너무나 아쉽다고 느끼는 절절한 글이였다. 애매한 결말부분이 좀 미흡하긴 하지만 촘촘히 수정을 가한다면 대박글이 탄생할거 같은 느낌이 든다. HM잡지사의 문턱이 제일 높다고 하니 승산이 있는 걸로 거기로 보내고 나머지 두개는 전에 인터넷 사이트에서 썼던 글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투고를 할 계획이였다.

이번에 내가 상을 타면 오빤 내게 해줄 건데요?

윤소율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현승우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눈부신 샹들리에 불빛아래 도톰한 그녀의 입술이 더더욱 발갛게 유혹으로 다가왔다.

해줘? 작가로 뜨게 되겠지? 넌 너대로 작가로 자리매김하는거고 난 나대로 협회 얼굴을 내는 거고? 이상 뭘 더 원해?

현승우가 감흥이 없다는 캔에 남은 맥주를 마저 목구멍에 털어넣었다.

그거 빼고 없어요? 난 원하는게 있는데.

윤소율은 서서히 손을 내밀어 현승우의 몸을 어루만졌다. 투구꽃을 떠올릴 때에는 탐험을 시작한 소년마냥 흥분에 들떠있던 현승우가 자신과 있을 때만큼은 왜 이렇게 딱딱하고 재미가 없는 사람으로 돌변을 하는지 알수가 없다.

? 오늘은 도저히 그냥 나 못 보내주겠어?

가슴 곡선과 매끈한 쇄골이 훤히 드러나는 나시차림에 희고 다리를 꼰채  요염한 자태로 서서히 유혹을 던지는 윤소율을 바라보는 현승우의 눈빛이 불빛에 더더욱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손을 내밀어 말랑한 윤소율의 입술을 어루만지면서 그는 또다시 투구꽃을 떠올렸다. 몽글거렸던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와 눈을 자극하던 새하얀 허벅지며 상처받은 토끼처럼 우울했던 그 눈빛, 보호본능을 자극하던 여리여리했던 그녀를 떠올리면 그의 몸은 어김없이 팽팽하게 부풀어올랐다. 현승우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윤소율을 번쩍 안아 침대에 쓸어눕혔다.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투구꽃의 , 사실 현승우는 그런 식으로 그녀를 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그 집요한 눈빛을 눈치채고 겹겹이 방어벽을 쌓는 그녀에게 더 다가갈 수가 없었고 그렇게 여러 문학사이트에 글을 많이 등록할 수 있도록 적지 않는 안내와 도움을 줬는데도 불구하고 곁을 한번도 안주는 투구꽃이 얄밉다 못해 순간적으로 망가뜨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사라진지도 어언 5년, 아예 저 세상으로 간 사람처럼 흔적없이 증발해버렸다. 현승우는 모든 기억력세포를 동원하여 그녀의 몸을 떠올리면서 분풀이를 해대듯 눈앞의 녀자를 안고 있는 자신이 비렬하게까지 느껴져 더더욱 자괴감이 일었다. 안을 때는 한없이 뜨겁게 반응을 해오는 윤소율의 몸이지만 눈앞의 녀자가 투구꽃이 아닌 윤소율로 인지가 되는 순간 뜨거워졌던 몸은 곧장 거짓말처럼 식어버리군 했다.

겨우겨우 몸안의 뜨거운 것을 분출하고나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허탈감에 현승우는 몸을 돌려 담배 한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이자 윤소율이 실뱀처럼 스르르 몸에 감겨들며 소곤거렸다.

좀만 있다 .

남은 마무리하고 완성이 되면 보내줘. 체크하고 바로 넘길테니까. 

언제 뜨거운 운우지정을 나눴냐는 건조한 표정으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주어입고 나갈 차비를 하는 현승우의 뒤모습에 윤소율은 짙은 소외감이 몰려와 온몸을 떨었다.

오빠…”

한잠 . 오늘 잡지사에 미팅이 있어서.

뒤도 안돌아보고 문을 나서는 현승우의 딱딱한 얼굴뒤로 싸늘히 굳어버린 표정의 윤소율이 잡고 있던 베개를 힘껏 던지고는 이불속에 얼굴을 묻었다.

 

11.

담배연기가 자오록히 피여오른 사무실안, 허국장이 진이에게 작품 수정의견을 전달하고 있는 중이였다. 작품분석을 하는 허국장의 표정은 평소와는 달리 자못 엄숙했다.

온라인 작품의 제한성은 독자들에게 전달해주는 메세지가 없다는 것이죠, 문학작품은 독자들에게 주는 메세지가 있어야 될뿐더러 슈제트가 있어야 됩니다. 슈제트가 굴곡지면 질수록 작품가치가 올라가는 법이고 시선을 끌게 되겠지요? 또 같은 구절에 두번이상 똑같은 단어가 등장하면 안됩니다. 언어결핍증이 있다는 걸 의미하니까요.

…”

그리고 지나치게 많은 구두어 사용 이거 문제 있습니다. 맞춤법에 맞춰서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설마 조문학과 졸업은 아니죠? 그럴리는 없겠지만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

아닙니다.

녀인의 목소리는 점점 땅으로 잦아들고 있었고 시선은 또다시 발끝을 향했다.

혹시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발끝만 내려보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고 섬뜩하는 그녀의 눈빛이 허국장의 얼굴을 스쳐지났다. 그런 진이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국장은 말을 계속 이었다.

대학을 나왔냐는 물음은 안한 걸로 하고 요즘 온라인세상은 아무나 글을 올릴 수가 있고 인증이 없이 바로 대중들과 만난다는게 문제입니다.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야 되는거지 그냥 올린다고 해서 작품이 되는 건 아니거든요. 작품은 무조건 작품성이 있어야 하고 재차 강조를 하지만 사회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정규적인 잡지를 통하여 개제되는 글들을 보면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있을뿐더러 일목요연하게 질서있게 정리가 되여있습니다. 근데 수진선생님의 글은 감동도 있고 스토리도 재미있고 좋은데 장면구성이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썼던 글 대부분은 메세지도 약한 편이죠. 그냥 심심풀이로 읽는 글이라면 될가요? 그래서 온라인창작이란 그 물에서는 오래 놀면 안된다니까. 나 요즘 당신이랑 비슷한 또래 온라인 작가들 작품도 보고 있는데 온라인창작을 했다는 친구들이 거의 대부분 범하는 실수입니다. 일종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솔직히 또 온라인에 글을 올린다고 해서 돌팔이도 다 작가라 쳐주지는 않습니다.

가타부타 대꾸가 없다. 허국장은 그럴수록 진이의 반응이 신경이 씌이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녀를 자극했는지 희고 말쑥하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잡지구매가 점점 줄어드는군요.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확실한데도 말입니다.

다소곳이 앉아있던 수진이가 고개를 들고 피씩 웃더니 매서운 눈초리로 허국장을 쏘아보았다. 순간 허국장은 숨이 턱하고 막혔다. 수진이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씁쓸하게 웃으며 허국장을 주시하던 수진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문학이 무엇입니까? 문학은 인간학이고 언어학이라구요?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헌데 설사 모든 면이 다 갖추었다고 한들 가슴을 울리는 글의 령혼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을가요. 저는 대학도 중퇴했고 문학장르가 무엇인지, 1인칭 3인칭 그리고 맞춤법 표기 아무것도 모릅니다. 네, 돌팔이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선생님의 생각과 달리 문학은 소통이라 생각하거든요. 마음속의 뜨거운 것을 쏟아내면 보는 독자들이 함께 뜨거워지고 공감하는 것, 그게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면 발표 아무리 많이 한다 해도 독자들과의 소통이 없으면 바다에 돌을 던져도 울림이 없는 것과 무슨 구별이 있을가요? 심오한 글은 다 좋다구요? 해독이 안되는 글은 그럼 다 메세지가 있는 글입니까? 독자들이 못알아보는 글은 그럼 어찌 평가를 해야 되는지요? 온라인 돌팔이들이요? 그렇게 평가를 하시는군요. 실례지만 먼저 일어날게요.

아니그럼 쏟아내면 문학이라는 겁니까그건…”

허국장의 말이 끝나기도전에 진이는 쌩하고 날바람을 일구며 출입문을 벗어나고 있었다. 허국장은 인상을 잔득 찌프린채 찬바람을 일구며 문을 나서는 그녀의 뒤모습을 멀끄러미 쳐다보았다. 헌데 이미 문을 나섰던 그녀가 한참을 문앞에서 망설이더니 다시 몸을 돌리고 돌아와 허국장앞에 섰다. 더없이 침착하고 처연한 표정이였다.

저번에 민족애는 있냐고 문학을 사랑하냐고 물으셨죠? 이제 대답할게요. 우리 민족과 문학 뜨겁게 사랑합니다. 하지만 저는 문학도 시대에 맞춰 발전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벌써 디지털 시대로 진입한지가 언제인데 케케묵은 걸 지켜가고자 한다면 문단은 퇴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온라인문학은 분명 문학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구요. 분명한 건 이 시대 독자들 또한 냄새나는 누룩같은 작품 아무도 보기를 원하지 않거든요. 독자 립장에서 솔직히 말씀드린겁니다. 례의를 다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만 가볼게요.

문을 나서는 그녀의 뒤모습을 맹랑한 기분으로 지켜보며 허국장은 미간이 점점 험하게 구겨졌다. 글을 배우러 왔다는 사람이 겸손한 자세로 몸을 기울이고 배워야 될 것인데 초반부터 바락거리며 달려드는 모습에 목이 꺽 메이는듯한 기분이였다.

다크써클이 깊이 진하게 져있는 보니 몇일동안 수정을 하느라 잠을 설친거 같은데 글을 가르친답시고 첫걸음에 너무 예리하게 짚은게 아닐가 슬그머니 걱정이 됐다.

성질머리도 ...

허국장은 수진이가 다시 꼼꼼하게 재수정해온 글을 읽느라 손가락사이에 끼운 담배가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국장님, 퇴근시간이 다 되였는데요.

전비서의 호출에 허국장은 겨우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땀이 질벅하게 흘러내려 몸에 끈적끈적 달라붙은 셔츠는 사무실을 뛰쳐나간 녀인만큼이나 허국장을 불편하게 했다.

그녀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치 따뜻한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을 보는듯한 싱그러운 기분이다. 요즘 잡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상큼한 현대 로맨스와 기상천외한 판타지, 그 어느 누구와 맞붙는다 할지라도 승산은 있는 싸움이였다.

허국장은 창밖을 바라보며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마치 예쁜 탁자 하나 조립하는데 필요한 나사못 몇개 사자고 자재시장에 들어섰는데 의외로 아주 탄탄하고 년륜이 예쁘게 지어있는 고급 나무 재료를 발견한듯한 설레이는 기분이였다. 조금만 일찍 발견을 했었더라면 몇년전에 문단에 데뷔를 하고 벌써 기량 넘치는 작가가 되여있을터인데너무 늦게 발견했다는 아쉬운 마음에 허국장은 마음이 더욱더 조급해졌다. 이제는 어떡하든 구슬려서 제대로 작품 한컷 만들어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한편 수진이는 꽃방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중이였다. 어느 대학을 나왔냐니? 거기에다 조문학부까지 들먹이며 온라인 창작 모두를 부인하는 폼에 신경이 거슬렸다. 글을 배우러 간 사람이 조금만 참을성이 있었으면 되겠는데 그만 자리를 확 박차고 나온 것이 화근이였다. 마음을 정리하느라 물통에 꽂아놓았던 생화 한아름을 빼여다 포장 선반우에 올려놓고 가위로 맞춤하게 짤라 바구니에 꽂기 시작했다. 심란할 때마다 어김없이 반복하는 마음 다스리기 운동이였다. 지난 세월 동안 꽃꽂이는 진이에게 많은 것을 터득하게 해주었다. 세속의 찌든 때를 피하는 방법도 명예와 부를 욕심내지 않고 세상이란 바다속에 몸을 담그고 마음을 정화시키는 방법도 모두 꽃을 접하면서부터 시작이 되였다. 그렇게 조용히 몇년을 살았다. 이제 더이상 몸을 혹사하며 글을 쓰지 않겠다고 더이상은 문학에 목매이지 않을 거라고 결심을 하며 무수한 밤을 꽃꽂이로 지새우며 불타오르는 글에 대한 열정을 겨우 앙금처럼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혔었다. 덕분에 목 조여오는 가난에서 벗어나고 풍족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만큼 재물이 모아졌다.

허나 고요했던 마음의 호수는 얼마전 남자를 만나서부터 돌이 던져진 것처럼 파문이 일기 시작했고 파도는 이제 혼자서 걷잡을 없을 정도로 점점 커져 제법 소용돌이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12.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보니 낮에 봤던 남자가 문밖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실례지만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진이는 대답대신 가위로 끈을 짤라 볼륨을 넣어 바구니에 부착할 리본을 풍성하게 부풀리고 있었다.

쌀쌀해진 진이의 표정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허국장은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원목탁자아래 의자를 빼놓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낮에 대화에서 제가 실수한 부분이 있었습니까. 억수로 언짢아보이는 표정인데요.

진이는 아무 대꾸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허국장은 또다시 박스등에 시선을 던졌다.

창가에 박스등에는 새로운 주제의 시구가 걸려있었는데 제목은 비상()으로 되여있었다. 담담했던 표정뒤에 엄청난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다는 걸 엿볼 수가 있었다. 문을 박차고 나가는 바람에 혹시라도 튕겨나갈가봐 걱정을 했었지만 그 시구를 보는 순간 허국장은 배짱이 두둑해져 얼굴에 미소를 슬그머니 피워올렸다.

만약 낮에 했던 말이 상처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다만 문학에 대한 소견을 말씀드렸을뿐인데 어느 부분이 상처가 되고 불쾌한 것인지 모르겠네요.

문학에 대한 소견이 저랑 틀려서요. 저는 문학 그런 거 모릅니다. 그냥 가슴이 시키는대로 썼을뿐입니다. 온라인 돌팔이요? 맞습니다 돌팔이. 근데 어쩌죠. 제가 돌팔이래서. 그런 돌팔이를 왜 또 찾아오셨습니까. 

아하, 난 이럴려고 찾아온게 아닌데 안다기보다 많이 접하고 있지요. 온라인 문학을 뭐라 한게 아니구요. 저는 다만 수진씨 재능이 그냥 온라인창작으로 끝나는게 아쉬워서 드린 말씀이였습니다. 여태껏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제가 발견해서 너무 행복했고 어떡하든 현재 글에 대한 정확한 해부가 필요하다고 느껴서 가감없이 느낀바를 표현했을뿐인데 그 말에 상처를 받은 모양이군요. 그래요. 인정할게요. 수진씨가 쓴 글 요즘 세대글답게 상큼하고 소재가 신선해요. 틀림없는 이야기군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사람들이 많이 공감해주고 사랑해주는 글에 소설의 틀과 메세지까지 더한다면 더 훌륭한 작품이 되지 않을가요? 근데 암수술을 하는 것처럼 온라인창작을 하면서 생각대로 퍼부으며 쓰던 습관들을 잘라내버리고 또 맞춤법 표기법, 그리고 장면구성 인칭 선택 면에서 많이 신경을 기울이셔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도와주겠다구요.

진이는 하던 일을 멈추더니 가위를 내려놓고 허국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있는 그녀의 우울한 눈빛을 보면서 허국장은 비를 흠뻑 맞아 온몸을 떨고 있는 한마리의 참새를 보는듯한 울적한 느낌이였다.

내가 도와주겠다구요. 노래를 아주 잘 부르는 가수가 있어요. 근데 그 가수는 악보를 볼줄 모릅니다. 악보를 배운 적도 본 적도 볼 줄도 모르는데 기가 막히게 심금을 울리는 노래를 부른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악보를 가르쳐줄려구요.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빙그레 웃으며 수진이에게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표정이 가득 씌여 있었다. 몇번 보지 못했지만 솔직하게 의사표현을 해오는 그 남자가 진솔해보여서 믿음이 갔다. 수진이는 길고 흰 손을 내밀어 남자의 손을 살짝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손에 닿자 싸늘했던 마음이 훈훈해졌고 둘은 그렇게 마주보고 웃었다.

오늘부터 1일 합시다. 아까 수정해온 원고를 뜯어봤는데 밤을 지새우며 노력한 흔적이 보여서 나도 밤을 패며 수정의견을 내고 장면구성을 다시 해야 될 부분 밑줄을 긋고 표기를 했으니 시간이 날 때 잘 뜯어보고 수정을 해보세요. 수진씨가 썼던 그 심금 울리는 로맨스는 일단 문턱이 제일 높은 HM 잡지사에 냅시다.

심금을울렸나요?

그는 머뭇거리다 조용히 물어오는 수진이를 바라보았다. 어떤 암울한 과거가 있는게 분명하고 또 그 과거에 갇혀 오랜 세월을 보낸듯하다. 글을 보면서도 허국장은 녀인의 아픔과 고통으로 얼룩져있는 지나간 과거를 눈으로 생생히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저려왔었다.

.

허국장의 대답에 진이는 멋적게 웃으며 흘러내린 긴머리를 살며시 귀뒤로 넘겼다.

차잔안에 김이 무럭무럭 나던 차가 식을 때까지 둘은 작품을 두고 열띈 토론을 벌였다. 초점 잃어서 서늘했던 눈빛이 작품을 논할 때면 유난히 반짝거렸고 그의 예리한 분석을 듣고 전혀 달통이 되지 않는 부분에는 가녀린 몸과는 상반되게 아주 강인하고 정확하게 자신의 의사표달을 하는 수진이를 보면서 허국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잠들어 있던 그녀의 심장이 서서히 깨여나고 있었다. 심장이 기지개를 켜는 소리를 듣는 거 같아서 허국장은 저도 몰래 숨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13.

시간이 그렇게 살처럼 흘렀다. 허국장의 도움하에 진이의 글쓰기 솜씨는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송우경과의 가슴 절절했던 그 러브스토리를 펴냈던 마지막 장편을 뜯어 장면과 스토리를 재구성하고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부분은 잘라내고 약 8만자가량은 다시 써내기로 했다. 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스토리별로 정리를 하고 거기에 장면구성을 하고 인칭을 바꾼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작업인지라 허국장은 걱정부터 앞섰지만 완벽을 추구하는 그녀의 고집을 꺽을 수가 없었다.

한밤중에 자다가 일어나보면 그녀가 당일 정리한 수정원고가 정확하게 메일로 도착이 되여있었다. 글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마른장작에 불이 붙은 것처럼 훨훨 타올랐고 그걸 바라보는 허국장은 덩달아 심장이 후끈거리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밤낮 구분없이 틈만 나면 글에 관한 의문들을 무더기로 쏟아내는 그녀를 보면서 허국장은 연신 감탄을 하다가도 급작스레 당기는 불길이 혹여라도 사그러들거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지치지 않을가 하는 부질없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허나 걱정했던 것과 전혀 달리 삶의 의욕을 잃은듯 무덤덤하고 싸늘했던 진이의 표정은 글을 쓰면서부터 나날이 활달해졌다. 가끔씩 주문이 끝나고 여유시간이 날 때면 진이는 허국장에게 얄궂은 장난을 걸어오기도 했다.

글만 보면 지치지 않아요? 자, 기지개를 켜고 목운동을 하는 겁니다.그리고는 향기 그윽한 커피 한잔 배달이요.

그녀에게서 문자를 확인하면 허국장은 귀신에게 홀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목운동을 대여섯번씩 했고 마치 커피 한잔을 배달받은 사람마냥 커피포트앞에서 따끈한 커피를 내리고 메세지를 통해 전달해져온 그녀의 온기가 식을새라 커피잔을 입술에 갖다대기를 반복했다.

여러가지 업무와 협회일로 갑갑해하는 허국장에게 잠시 숨돌릴 틈을 주느라 평소에 재치있게 롱담을 건네며 장난을 치다가도 작품토론에 들어가면 그녀는 더없이 진지했다. 그녀와 장면구성때문에 대화를 해보면 그 소설 자체에 생생하게 생명력을 부여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상황극을 만들어내 주위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을 관찰하고 메모를 해뒀다가 스토리를 엮을 때 캐릭터별로 생동하게 재생을 시켰다. 그렇게 살아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열과 성의를 다하는 수진이를 보면서 허국장은 참 오랜만에 20대의 젊은이처럼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둘은 작품분석을 함께 하고 문학에 대하여 의견을 나눴으며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해부를 하면서 서로 공감을 하며 점점 가까워졌다. 그렇게 대부분의 시간들은 글에 대한 담화를 나누며 깐깐한 수정을 거쳐 드디여 탈고를 하는 날이 다가왔다.

전날 저녁 늦게까지 그녀와 작품에 대해 담론을 하다 새벽녘에야 간신히 새우잠이 들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아침이였고 옷을 입은채로 작업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허국장은 작업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시계를 보았다. 아침 아홉시였다. 창밖은 이번해 마지막일거 같은 늦은 가을비가 또 내리고 있었다. 이제는 초겨울이 다가올려는지 제법 쌀쌀한 날씨다. 주섬주섬 옷을 주어입고 양치를 하다 핸드폰을 들여보니 그녀의 위챗창에는 완성된 소설 세편을 모두 편집부 메일로 발송을 했으니 걱정말고 잘 쉬라는 메세지가 도착해있었다.

,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예요.

마감으로 남긴 메세지가 새벽 1시 31분, 그뒤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그 메세지를 보는 순간 허국장은 허무감이 파도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이면 그녀의 굿모닝 인사와 함께 달콤한 커피 한잔 이모티콘이 배달되여 왔고 업무를 보면서 지루하다 느낄 때면 어김없이 그녀의 재치있는 롱담이 도착해 있어 재미가 쏠쏠했었다. 작품을 수정할 때는 가끔 가다 의견이 불일치해 모순과 갈등을 빚어낼 때도 있었는데 그때에도 침묵을 지키면서도 자리는 지켜주고 있는 그녀가 있어서 외롭지가 않았었다. 길들여지는게 제일 무서운 거라고 어쩌다 텅 비여있는 대화창에 로그아웃이 되여있는 그녀의 메신저를 보며 허국장은 가슴 한켠이 구멍이 난 것처럼 시려나기 시작했다.

라면 뚜껑을 더운 물을 부어넣고 소세지도 짤라 함께 넣었다. 딸애가 숙소로 가면서부터 허국장은 거의 작업실에서 밤을 지새우다 싶이 했다. 특히 새로운 작품구상이나 분석을 할 때에는 주위사람들의 방해가 있으면 집중이 되지 않아 몰래 장만해놓은 자신만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언젠가 수진이가 늦은밤까지 작업을 하는 그가 안쓰러운지 왜 집에 안들어가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불행했던 혼인에 대해 약간 언급을 하자 그녀는 묵묵히 경청을 해주었다.

저녁이 되여가는 시각에도 그녀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허국장은 일을 하면서도 쉼없이 챗팅을 했던 대화창을 기웃거렸다. 까맣게 먹통이 되여버린 그녀의 프로필 사진은 미동도 없었다. 그동안 밤을 지새우며 작품을 완성하느라 지쳐서 잠을 자고 있겠지 자아위안을 하면서도 아무 연락도 없는 그녀가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 생수 한병을 벌컥거리며 마셔버렸다.

협회일과 여러 업무들은 그래왔듯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셔츠우에 맨 넥타이처럼 목을 조여오는 갑갑한 분위기에 허국장은 또다시 담배를 더듬었다. 여러 잡지에서는 이제 문학면을 취소한다는 소식이 귀가 닳도록 전해져왔고 우리 민족의 작가들이 글을 실을 수 있는 잡지 공간은 점점 줄어들어 이미 제한이 되여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신인 발굴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고 발굴이 된 신인이라 할지라도 키우는데는 오랜 시일이 걸리는 일이라 무척 신경이 씌였다. 이러다가 정말 이 세대가 이 땅에서 민족문자로 작품을 남길 수 있는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을가 하는 불안감이 점점 현실로 엄습해오고 있었다. 신인을 빨리 키워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민족 언어로 글을 쓸 수 있을 때 많은 작품들을 탄생시켜야 한다. 각 잡지사에서 여러 문학상을 설치하여 조선족문학의 세대별 작가대오 균형을 도모하고 차세대 작가를 발굴하고자 애쓰고 있으니 이번 특집 기획만 잘되면 기량이 있고 생기 넘치는 끌끌한 작가들이 많이 양성이 될 것이다.

가운데는 분명 수진이가 선점을 하게 것이고 우후죽순처럼 많은 작가들이 태여나게 것이다. 이름 모를 희열과 기쁨이 허국장의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문학의 일선에서 많은 작품으로 문단을 채웠지만 각 세대마다 그에 따른 새로운 독자들이 있기에 이제는 조용히 후배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젊은이들에게 발전공간을 마련해줄 예산이였다. 20여년을 문단에 바쳤는데 솔직히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제 딸애가 졸업을 하고 조금 장성해서 부부사이 갈등을 리해하고 리혼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채소밭이 달린 작은 시골집에서 낚시나 하면서 홀로 조용히 로후를 보낼 계획이였다.

하지만 그전에 해야 일이 있었다.

 

14.

자리에 계세요…”

그녀의 문자 메세지가 도착한 것은 대충 저녁을 떼우고 후였다. 기다렸던 프로필사진이 뜨고 대화창이 반짝이자 허국장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마음이 다급해졌다. 떨리는 손으로 문자를 찍어넣느라 한참 다이얼을 누르고 있는데 상대쪽에서 보낸 문자 한줄이 먼저 떴다.

잠시 만날가요…”

발에 날개라도 달린 허국장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옷장에서 산뜻한 옷을 꺼내입고 오랜만에 스킨로션을 찍어바르고 옷매무시를 바로 잡은 뒤 그녀와 약속한 장소로 이동을 했다.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그녀가 앉아있는 벤취가 보인다. 진이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을 감은 채 공원벤취에 홀로 앉아있었다.

허국장은 조용히 그녀가 앉아있는 벤취옆자리에 조심스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상큼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며 피부에 와 닿는다. 살풋이 감겨 있는 그녀의 눈초리가 유난히 길어보였다. 이렇게 보면 한없이 가냘퍼서 툭 하고 부서질거 같은 여린 몸인데 대화를 해보면 유쾌한 에너지를 듬뿍 넣어주는 달콤한 냄새가 나고 작품을 론하거나 만들어낼 때는 먹잇감을 노리는 용맹스런 야수마냥 파워가 넘친다. 카멜레온처럼 컬러를 쉼없이 바꿔가며 자신만의 신비색채를 드러내는 수진이를 보면서 허국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눈앞의 그녀처럼 조용히 눈을 감고 저녁공기를 들이켜보았다. 페부 깊숙이 시원한 공기가 스며들어 도시의 찌든 냄새를 밀어내고 있었고 서늘한 바람에 떨어지다 만 나무잎들이 사락사락 소리가 난다. 가까이서 빵빵거리던 차경적소리와 여기저기 저녁 운동을 하며 켜놓았던 음악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지고 있다. 허국장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신기하게 초조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사유가 말끔해졌다.

언제 오셨어요. 오셨으면 부르지 그러셨어요.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그녀가 이내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에 일어서서 허국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얘요. 오래동안 휴식이 없어서 힘들었는데..

허국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나무잎과 먼지들을 털어냈다.

엷은 니트에 기다란 모직 롱치마, 베이지 코트우에 두른 그녀의 화이트 머플러가 유난히 눈에 부셨다.

둘은 자작나무숲을 따라 나란히 거닐었다. 찌부둥하게 흐려 있던 저녁 날씨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비방울이 후둑이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찬바람에 몸이 오싹했는지 진이가 몸을 옹송거렸다.

비가 오는 날에 옷을 두껍게 입었어야 되는데.

허국장은 핀잔을 하듯 진이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코트를 벗어 진이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걷네요. 아, 너무 좋다. 비오는 날에는 치마를 입어요. 리유가 뭔지 아세요.

허국장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그런 반응이 재미있는다는 듯 수걱수걱 허국장의 뒤를 따라 걷던 수진이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쌩긋 웃었다.

비오는 바지를 입으면 바지 가랭이가 젖을가봐요.

해뜨는 날에는 바지를 입지요. 살갗이 탈가봐요.

허국장은 그녀의 엉뚱한 발상에 참지 못하고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진이는 그런 허국장의 반응이 마냥 즐거운듯 눈을 내리깔고 살풋이 웃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치료비가 없어서 포기를 했어요. 돌아가시는 날 엄마가 그러시더군요. 엄마 딸로 와줘서 고맙다구요가난을 원망하지 않는다구요.

줄레줄레 허국장의 뒤를 따라 걷던 진이가 뜬금없이 내뱉은 말이였다. 순간 허국장은 심장에 그 무엇이 관통된 듯 욱신거려 몸을 흠칫 떨었다. 그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진이를 바라 보았다. 담담하게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는 그녀의 눈은 발갛게 충혈이 되여있었다.

엄마는 그렇게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현승우에게 겁탈을 당할번했던 그날이였다. 문학을 사랑해서 그 무엇에 홀린 듯 글로 하고 싶은 말을 물 푸듯 쉼없이 퍼내는 딸의 의지를 꺾을 수가 없었다.

학교를 다닐 때부터 잡지에 투고를 해서 받은 원고료로 남편 일찍 여읜 엄마에게 속옷을 사줄 정도로 효녀인 딸이였지만 대학에 입학을 하자 거액의 학비가 발목을 잡아 더이상 보낼 수가 없었다. 엄마가 알면 혹시라도 가슴 아파할가봐 아예 숙소를 정리하고 짐을 싸고 미리 선불되였던 학비를 되찾아 계좌이체를 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나와서 좋아하는 문학을 하면서 생계유지를 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점점 빗나갔고 몇번이나 취직을 했다가 경력과 학력때문에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아예 취직을 포기해버렸다. 몇편의 글을 써서 편집부에 투고도 해봤지만 모두 몇달동안 바다에 던진 돌마냥 고요했고 운이 좋아 한편씩 개제가 될 때 날아오는 엷은 원고료로 삶을 유지하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글을 쓸 수 있는 사이트를 찾아다녔다. 먹장구름처럼 꽉 밀려오는 생활난과 스트레스로 인해 뭔가는 분출구가 필요했던 것이였다.

그녀의 폭주는 그때부터였다. 낮에는 알바를 쉼없이 하고 저녁에는 좋아하는 글을 인터넷 사이트에 마음껏 썼다. 그냥 뜨거운 가슴속에 잠재되여 있는 많은 말들을 글을 통하여 뿜어내고 싶었다. 그게 정규적인 잡지가 아니래도 누군가 자신이 쓴 글을 보면서 댓글로서 내면에 갇혀있는 자신과 소통해주고 또 공감을 해주는 것만으로 안도를 하고 만족을 했다. 그렇게 써낸 글이 무려 200편이였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오프라인 작가로 만들어주겠다는 현승우를 만났다. 팬미팅이 있는 날 이제는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는줄 알았지만 그건 분명 다시 꾸고 싶지 않은 지독한 악몽이였다. 그날 호텔 카운터에서 앰블런스에 실려서 병원으로 이송되여 눈을 떴을 때 엄마는 이미 중환자실에 들어가 있었고 그런 악몽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하늘나라로 갔다.

평생 가난에 시달려 살다보니 엄마는 흔하다고 하는 보험도 사놓지 못한 형편이였다. 한평생 쪼들리는 생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시는 그날에도 문학에 미쳐 병원비도 대주지 못하는 가난한 딸에게 원망보다는 사랑한다는 말을 했었다. 무릎이 꺽이고 살이 짓이겨지는 혹독한 아픔이였다. 엄마를 보낸 뒤 그녀는 결심을 했다. 글에 대한 모든 욕망을 잠재우고 연못안의 부평초처럼 고요하게 살아가기로

후둑거리며 떨어지던 비방울이 점점 거센 장대비로 쏟아졌다. 허국장은 한껏 들이킨 숨을 내쉬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쉼없이 쏟아지는 비물이 진이의 옷자락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녀의 어깨가 비바람속에 더더욱 가냘퍼보였다. 그는 손을 내밀어 수진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투명한 액체가 허국장의 손에 뚝뚝 떨어졌다.

깃털이 젖은 참새 한마리를 안고 토닥이듯 허국장은 조심스레 그녀의 몸을 감싸안았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그녀의 볼에 닿았다가 말캉한 입술에 천천히 가 닿았다. 쏟아지는 폭우속에서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뜨거운 딥키스를 이어갔다.

 

15.

꽃방옆에 위치한 진이의 방안, 나란히 마주선 두 사람이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비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울적한 눈빛,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허국장은 목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손을 내밀어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안고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려주었다. 허국장의 온기 어린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던 진이가 발갛게 익은 입술로 부드럽게 입맞춤을 해오며 서서히 허국장의 마음에 욕망의 불길을 지피고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닿는 곳마다 허국장은 구름우에 둥둥 떠오르는 황홀한 기분이였다. 불빛보다 더 이글거리는 남자의 눈빛에 진이는 몸을 휘감고 있던 젖은 옷들을 수줍게 한겹 한겹 벗어 던졌다. 옷이 미끄러지듯 스르르 그녀의 몸에서 해방되고 감추어두었던 새하얀 속살을 드러내는 순간 허국장은 끓어넘치는 욕정을 더 이상 주체할 수가 없었다.

파르르 떨고 있는 진이를 안고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몸 아래서 뜨겁게 반응해오는 육감적인 그녀의 몸은 더없이 포근하고 따뜻했다. 그의 온몸은 희열에 들끓었고 세포가 살아난 듯 꿈틀거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자신의 분신이 녀인의 몸과 혼연일체를 이루는 것을 느끼는 순간 허국장은 온몸이 전율하는 쾌감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온몸을 깡그리 불태웠던 화끈하고 정열적인 밤이였다.

조롱안의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아침 공기를 느끼며 진이는 눈을 떴다. 오랜만에 악몽을 꾸지 않고 달콤한 잠을 잔 날이였다. 진이는 아침에 일어나 입술을 살며시 만져보았다. 엊저녁 느꼈던 남자의 부드러웠던 손길과 뜨거웠던 포옹, 그리고 온몸을 불태울 기세로 나눴던 정열의 키스 모든것은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였다. 식탁우에는 금방 끓여놓은 듯한 야채죽과 계란 후라이가 놓여있었고 위챗대화창에는 남자가 남긴 메세지가 도착해 있었다.

오늘만큼은 마음 놓고 자기. 남자대 녀자로 명령함.

진이는 대화창에 찍혀있는 익살스런 이모티콘과 귀여운 명령에 얼굴이 화끈거려 이불 귀퉁이를 당겨다가 머리 끝까지 덮어씌고 눈을 감았다. 말없이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극도로 위안이 되는 사람이 있었다. 허국장이 그랬다.

현승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호텔로 들어가는 사진이 문학사이트에 대문짝만하게 뜨자 제일 먼저 격한 반응을 보였던 남자친구였던 송우경이였다. 동창이였던 송우경과의 기나긴 연애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차라리 어떻게 그런 사진이 찍혔던 것이였냐고 물어보기라도 했다면 그 모든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오해를 풀수 있었을텐데 그날부터 송우경은 아예 진이를 온역이 든 사람 보듯 철저히 외면해버렸다. 그뒤 누군가를 통해 어느 잡지사의 편집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귀도 마음도 다 닫힌 진이는 아예 사랑의 빗장도 함께 닫아버렸다. 그래서 인생에 두번 다시 사랑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날 흘러나오는 피를 지혈시키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바쁜 일정때문인지 남자는 항상 말수가 적었지만 작품 분석에서는 칼날처럼 예리했고 문학에 대해서는 남다른 시각과 애착을 가지고 따뜻한 인간애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였다. 쉼없이 작품을 통하여 할 말을 쏟아내는 진이가 지칠세라 가끔씩은 작품을 받고도 수정의견을 내지 않고 깔아둘 때도 있었는데 그건 좀 쉬라는 무언의 배려이기도 했다. 작품을 몇편 고안해 잡지사에 투고를 할 때에도 밤잠을 설쳐가며 그녀와 함께 고군분투를 해주었고 따뜻한 조언과 예리한 분석을 아끼지 않았다. 글쓰기는 외로운 작업인 것만큼 밤늦도록 구상을 하다가 뭔가 자체갈등을 겪고 막히게 되면 그녀는 어김없이 허국장을 떠올렸고 그에 관한 의문이나 질문을 터놓을 때면 만사를 제쳐놓고 성심성의껏 답을 해주었다. 그만큼 진이에 대한 허국장의 애정은 남달랐다.

세편의 특집원고를 탈고한 진이는 온라인에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지면발표만 문학으로 인정해주는 사람들에게 도발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이는 제일 먼저 아직은 온라인 문학에 대해 많은 불신과 오해를 품고 있는 듯 보이는 남자에게 온라인 문학의 묘미를 알려주고 싶었다.

수진이가 듀엣글을 쓰자는 의향을 밝힐 허국장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침묵을 묵인으로 받아 들인 채 웹사이트 아이디를 두개 만들어 비번과 함께 건네주고 작품 스토리에 대한 구상을 세세하게 공유를 하자 허국장은 그때에야 지면발표에 듀엣과 릴레이는 문단에서 인정이 되지 않는 글이라 별 영양가치 없는 글을 쓰기보다 좀 쉬였다가 지면발표할 글에 더 신경을 쓰라며 조언을 해주었다.

생활리듬이 빠르고 스트레스에 찌들어 사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옛날처럼 책을 사들이고 책장을 번지면서 독서를 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해외에서는 이미 휴대폰이나 컴퓨터로 수시로 볼 수 있는 전자책이 출판되고 있고 웹소설도 인기를 끄는 장르가 되고 있었다. 많은 잡지사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계정을 구축하여 작품들을 펴내고 있지만 제한이 되여 있는 부분이 너무 많아 진이는 안타까워졌다. 우리 문학을 널리 알리는데는 인터넷이 좋은 매체이지만                                                                                                                                                                                                                                                                                                                                                                                                                                                                                                                                                                                                                                                                                                                                                                                                                                                                                                                                                                                                                                                                                                                                                                                                                                                                                                                                                                                                                                                                                                                                                                                                                                                                                                                                                                                                         워낙 우리글을 알아보고 읽어주는 독자들이 적은데다가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문학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고 또 맞춤한 시스템이 구축되지 못한게 큰 문제였다. 잡지구매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건 위기의 신호였다.

꾸준한 진이의 설득하에 허국장은 오래동안 꺽고 있던 필묵을 다시 들어보기로 결심을 내렸다. 요즘 세대들이 왜 그토록 온라인 문학을 고집하고 있는 건지 궁금한 것도 있었지만 온라인창작은 진이에게 스토리 구상부분에 얼만큼 도움이 될거 같아 대답을 했던 것이다.

둘은 함께 듀엣 소설을 쓰면서 더욱 자주 만났다. 자전거로 짧은 거리 려행을 하고 해볕이 좋은 날에는 등산을 하거나 테니스도 함께 치며 데이트를 했다. 허국장은 업무나 협회일때문에 스트레스에 절어있다가도 한번씩 그녀를 만나면 유쾌한 에너지에 젖어 모든 잡념과 근심을 털어 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스토리 엮는 연습으로 시작했던 듀엣글들이 중반부분을 넘어서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해 련거퍼 사이트에서 추천 베스트에 올랐다. 댓글을 달고 뜨거운 공감을 하고 상세한 피드백까지 해주는 독자들도 생겨나고 있어서 둘은 흥분에 들떠 있었다.

진이와 듀엣글을 인터넷 사이트에 개제를 하면서 허국장은 그제서야 요즘 젊은이들이 그토록 온라인 문학을 고집하며 오프라인 등단을 꺼려했는지 알수 있을거 같았다. 온라인에서는 그 어떤 기다림도 필요없이 글이 바로 등록이 될 수 있으며 댓글에서 령감을 얻고 미흡했던 스토리를 수정할 수 있었고 즉시 독자들의 느낌과 리해를 바로 전달을 받을 수 있어서 스토리 구상에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글에 대한 반응이 재빨리 안겨와서 글쓰기 창작에 더더욱 힘이 실릴 수가 있었다.

섬세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굵직한 스토리들을 만들어내는 진이의 능력에 허국장은 감탄을 했고 진이 또한 허국장의 노련함과 진실성있는 글에 감동을 했다. 그렇게 둘은 가랑비에 옷자락이 젖어드는 것처럼 서서히 서로에게 젖어들었다.

 

16.

한편 HM 잡지사 송우경 편집은 8090특집원고들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였다. 최종검토가 끝나면 수상자 명단이 발표가 될 것이고 수상자들은 작가로 데뷔를 하게 된다. 특히 유실된 세대 8090에 관한 특집이고 새로운 인재발굴에 관련이 된 기획이였기에 모든 협회에서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라 더더욱 신중에 신중을 가해야 되는 법이였다.

헌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대상 후보로 올라온 작품 두편이 아이러니하게도 똑같은 스토리와 등장인물에 결말만 다르다는 것이다.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 똑같은 작품을 보내온 작가의 이름은 박수진과 윤소율, 박수진이라는 이름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송우경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또다시 그녀와 헤여지던 그때가 떠올랐다.

찢어진 블라우스 사이로 드러난 하얀 속살, 팅팅 부은 얼굴과 눈두덩이, 사진속의 그 녀자는 분명히 진이였다. 어떤 남자와 한데 엉켜 붙은 그 모습을 보면서 송우경은 크게 숨을 들이키고 눈을 감았다. 분명히 합성이 될수도 있는 사진이라며 자아위안을 해봤지만 바로 이튿날에 문학사이트에 어떤 남자와 다정하게 붙어 호텔로 들어가는 그 뒤모습을 찍은 사진이 떴다.

여기저기서 학교 선후배들이 전화를 걸어와 괜찮냐는 말을 건넸고 가족들조차도 흉측한 일이라며 입을 모았다. 그렇게 마음이 베여 몇날며칠 술에 절어 자취방에 박혀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보니 그녀는 세상에서 증발해버렸다. 쓰던 번호도 없는 번호로 되여 있었다. 겁탈을 당할번 했던 애인을 감싸지도 못한채 자초지종을 캐지도 않고 외면했던 자신의 옹졸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뜯겨나간 듯 아파올뿐이였다.

안녕하세요. HM 잡지사 송우경 편집이라고 합니다.

수아네 학교에 행사가 있어서 잠간 학교에 다녀오겠다며 허국장이 사무실을 나선 전비서는 사무실에 앉아 송우경에게서 걸어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잊고 프로필을 보낸건가요? 그 작가 전에 온라인창작을 좀 했었어요...

전비서가 불러주는 상세한 신상정보를 통해 진이가 맞다는 확인한 송우경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뱉어냈다.

혹시 작가가 살고 있는 주소 알수 없을가요…”

진이가 운영하는 꽃방 주소를 대줬더니 송우경 편집은 인사말을 하기 바쁘게 황망히 전화를 끊었다. 그런 행동이 의아하긴 하지만 다시 되물을수도 없는 상황이라 전비서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시각 허국장은 오랜만에 안해와 수아와 함께 딸애네 학교 행사에 참여하러 가는 중이였다. 기특한 녀석이 고중부문 전국 시짓기 경연에서 2등상을 받게 되여 시상식에 함께 초대되였다는 것이였다. 맨손으로 보낼 수 없다고 안해가 우기는 바람에 꽃다발을 주문하러 꽃방에 들어가게 되였는데 딸애가 손을 이끄는 곳은 공교롭게도 진이네 꽃방이였다.

한편 진이는 시간에 아침 주문을 끝내고 탁자에 기대여 한숨 돌리고 있는 중이였다.

허국장과의 만남 이후부터 마음속에 평온이 찾아들었다. 시내물처럼 돌돌 흐르며 잔잔하게 감싸오는 사랑, 인터넷 사이트에 듀엣글을 개제하면서부터 둘은 혼연일체가 되여 더더욱 령혼의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중에서 문학이라는 소통도구로 서로를 알아보고 리해하고 둘사이는 눈빛만으로도 원하는 걸 알수 있는 그런 묵계(默契) 있었다.

박스등을 닦고 매직으로 예쁜 시구를 적고 있던 진이는 누군가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창문쪽에 무심코 시선을 던졌다. 눈길이 간 곳에는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우두커니 서서 진이가 있는 쪽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세월동안 기억의 저켠에 묻어놓고 살았던 송우경이였다.

 탁자우에 놓여진 커피가 식을 때까지 한참동안 걸상에 앉아 침묵을 지키던 송우경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때 그렇게 사라졌어…”

오랜 세월의 기다림만큼 그의 목소리가 갈려 더욱 처량하게 들렸다.

오래잖아 겨울이 되려나봐.

 “ 그렇게 사라졌어?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래일은 추워질거라고 일기예보에서 그랬던거 같은데…”

눈앞의 녀인은 더이상 5년전처럼 순수하고 활달한 모습이 아니라 세월에 긁히고 짓이겨져 더 단단해지고 침착한 모습이였다.

진이야…”

그만하자…”

송우경은 그녀의 서글픈 눈빛을 보는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울컥하며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랐다.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려왔던가? 만나게 되면 사랑한다고 다시 시작해보자고 담대하게 고백을 할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입이 얼어붙은듯 떨어지지가 않는다.

송우경은 자리를 피하는 그녀에게 다가가 무작정 끌어안았다. 코를 기분 좋게 자극하는 건 분명 익숙한 진이의 체취인데 그녀의 몸과 얼굴은 더없이 싸늘했다.

시각 안해와 딸이 꽃방으로 들어가고 허국장은 문밖에 서서 꽃방안에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그동안 진이와 많은 대화를 나눠왔지만HM잡지사의 송우경 편집과 아는 사이라는 걸 그녀는 한번도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그냥 아픈 상처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직접 그 현장을 목격해보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손님이 들어선 확인한 송우경이 자리를 피하고 꽃주문하러 들어온 손님 맞이에 진이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기둥뒤에 몸을 숨기고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데 문득 딸애가 예쁜 꽃다발을 끌어안고 헐레벌떡 가게에서 뛰쳐나오더니 흥분에 들뜬 목소리로 허국장을 향해 물었다.

아빠, 언니가 만들어준 꽃다발 어때요? 예쁘죠?

순간포장도구들을 정리하던 진이의 시선이 유리창을 넘어 허국장이 서있는 곳으로 향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지만 두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한참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물기가 그렁그렁 괴여오르기 시작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진이는 그대로 눈을 살짝 내리깔더니 짐짓 태연한 척 몸을 돌렸다.

그녀에게 아무런 약속을 줄수도 없고 함께 할수도 없는 자신이 야속하다 못해 그는 이가 갈렸고 아무런 명목이 없다보니 묻지도 따질수도 없는 그런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게 느껴졌다. 허국장은 그렇게 서서히 진이의 꽃방에서 발길을 돌렸다.

 

17.

한편 송우경은 진이네 꽃방에서 터벅터벅 걸어 사무실로 돌아왔다. 오래동안 잠적했던 그녀를 찾았다는 희열도 잠시 자신에 대한 진이의 싸늘한 태도에 송우경은 가슴이 아려왔다. 한없이 따뜻했던 그녀였는데 5년이라는 세월동안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문학에 미쳐 자신을 내던지던 야생마같은 눈빛의 그녀가 아니라 오랜세월에 부대끼고 짓이겨져 더한층 성숙된 모습이였다. 그래서인지 너무 생소하게 느껴졌다.

특집 작품으로 그녀의 소설에 등장이 둘의 러브스토리를 보면서 송우경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사랑을 속삭이며 미래를 디자인하던 그들 둘, 문학으로 소통을 하면서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또 공감하며 전율을 느꼈고 함께 작가를 꿈꾸었었다.

그뒤 겁탈을 당할번하고 엄마를 잃어버리고 거기에 더해진 남자친구의 외면까지

5년전 그날 자신이 그녀를 죽였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사회의 시선과 고정관념에 얽매어 오해를 풀고자 그 어떤 노력을 하지도 않은 채 팔을 늘어뜨리고 그녀의 숨이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면 온몸을 옹송거리고 있는 그녀를 지켜줄 수 있을가? 사회의 비뚤어진 그 시각과 세치혀를 감당할 수 있었을가?

또다시 표절의혹에 휩싸인 진이,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줄 것이다. 물론 상대가 이 바닥에서 소문자자한JK일보 현기자라 할지라도 상관이 없었다. 송우경은 뭔가 결심을 내린듯 주먹을 힘껏 거머쥐고 전화 다이얼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상 수상자 명단이 발표되였다. 대상의 영예는 한치의 오차없이 박수진에게로 돌아갔다. 모터작동모드로 쉼없이 탱탱 여문 글들을 쏟아내는 진이의 작품이 온과 오프에서 다 대박이 났고 문단에서는 보기 드문 다작 작가라며 입을 모았다.

반면 윤소율의 글은 투구꽃의 온라인 소설 몰락하는   글을 표절한 의혹에 휩싸였다. 특집 주최측에서는 긴급위원회를 결성하고 표절사건을 조사하게 되였다. 표절의혹에 휩싸이자 윤소율이 소속해있던 JK일보사는 벌둥지를 쑤셔놓은 듯 뒤숭숭해졌다. 그전에 발표했던 네편의 작품 역시 사이트에서 베껴온게 아니냐는 의혹이 점점 더 불거졌고 그녀의 글을 즐기던 독자들도 등을 돌렸다.

그러자 현승우는 이를 부드득 갈며 달려들었다. 누군가는 JK일보를 노리고 한 짓이 틀림이 없었다. HM 잡지사에 전화를 여러번 걸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똑같았다. 원 작가를 찾았고 또 청춘이라는 웹사이트에서도 원 작품을 입수했으니 윤소율의 표절은 이미 기정사실이라는 것이다.

대상수상자 명단에 오른 박수진이라는 이름을 바라보며 현승우는 얼굴에 묘한 미소를 피워올렸다. 허국장이 뒤를 받쳐줘서 좀 뛰는 모양인데 둘이 건방을 떠는 모습을 그냥 이대로 지켜볼 수는 없다.

뒤골목 건달들을 시켜 허국장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게끔 하고서야 현승우는 겨우 투구꽃이 운영하고 있다는 꽃방의 주소를 알아냈다. 요즘 함께 온라인 듀엣글을 개제하고 있다는 것과 둘사이 관계가 아주 친밀하다는 것까지 알아내고는 현승우는 두주먹을 불끈 거머쥐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서쪽하늘을 물들였던 노을이 점점 지고 지평선 너머부터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했다. 진이는 창가에 앉아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며 사색에 잠겨 있었다. 뜨거운 가슴으로 써낸 글들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주었고 사이트에 쓴 글들과 지면 발표에 나가는 글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아주 충실하고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허국장과 함께 쓴 듀엣글은 댓글 1위 베스트 1위를 기록하며 연거퍼 몇달동안 줄곧 사이트에서 연재가 되였다.

손을 살그머니 왼쪽 가슴에 대보았다. 오래동안 잠들었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쿵쿵 리듬감이 있게 춤추듯 요동을 쳤고 온몸이 따라 전율을 하고 있다. 창턱에 기대 무심코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동안 문득 눈앞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얼른거리더니 눈깜짝 할사이 다가와서 진이의 몸을 덥석 끌어안았다.

흐흐..여기에 숨어 있었군그래.

구렝이처럼 똬리를 틀고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현승우였다.

어떻게…”

짓꿎은 눈빛이 소름이 끼쳤다.

? 어떻게 들어왔냐고? 이 바닥에서 내가 못하는 일이 있었던가? 이 현승우를 너무 무시하고 있었나본데?

5년전 악몽이 되살아나는듯 진이는 또다시 식은 땀이 흘러내리고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오기 시작했다. 현승우는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진이를 쓸어뜨렸고 생화를 포장하던 노끈으로 그녀의 몸을 꽁꽁 묶었다. 걸상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묶은 뒤 손을 내밀어 진이의 두볼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순간을 기다려왔지어차피 내꺼 될게 뻔한데 그렇게 피해다녔어? 아주 당신 생각나서 미칠번했다니까. 오늘 그동안 풀지 못한 회포를 다 풀어야 되겠지? 흐흐…”

현승우는 알릴듯말듯 아슬아슬 윤곽을 드러낸 그녀의 가슴 곡선을 눈요기하며 군침을 꿀꺽 삼켰다. 진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한겨울날 뜨거운 화로불처럼 이글이글 야욕으로 불타올랐다. 현승우가 가슴쪽으로 손을 서서히 뻗어왔다. 순간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척 하던 진이가 자신을 향해 뻗은 현승우의 손을 이악스레 물었다.

~!

손을 빼내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던 현승우의 눈빛은 섬뜩해졌다. 오늘밤은 기어이 눈앞의 녀인을 안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야수처럼 진이에게 덮쳐들었다.

그때였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현승우가 총 한방 맞은 메돼지처럼 맥없이 쭉 늘어졌다.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였다. 그뒤로 몽둥이를 든채 땀벌창이 되여 진이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허국장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을 확인하기 바쁘게 진이는  충격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18.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였고 침대곁에는 허국장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진이를 내려다보며 곁을 지키고 있었다. 경찰서에 신고를 했고 현장에서 현승우를 체포해 조사하는 중이니 안심하라는 허국장의 말에 진이는 그제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수가 있었다. 푹 꺼져있는 눈과 걱정어린 남자의 눈길을 확인하는 순간 진이는 안도한 듯 소리내여 흐느꼈다.

허국장은 서서히 손을 뻗어 쉼없이 몸을 떨고 있는 진이를 넓은 품으로 포근하게 끌어안았다.

시각 진이네 꽃방 앞에는 그린컬러 택시 한대가 멈춰져 있었다.

몇컷 낚았으니 이제 그만 가지.

차안에는 마스크를 쓴채 내리드리운 차창을 통해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중얼거리는  녀인이 있었다. 녀인의 주문에 택시기사는 시동을 걸었고 택시는 곧 먼지를 날리며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허국장의 뒤를 쫓은 사람은 다름아닌 윤소율이였다.

사실 허국장은 대상 수상자명단이 발표된지 되였는데도 둘사이 흐르는 어색한 기분때문에 축하를 해주지 못한게 마음에 걸렸었다. 그래서 축하차로 진이네 가게 들렸다가 이런 일들을 목격하게 된 것이였다. 경찰서 서장과 마침 아는 사이여서 급히 출동을 할수 있게 된 것이였고 현장조사에서 목격한 그 모든 내용을 진술한 뒤 현승우는 그 자리에서 포박당해 구치소에 들어갔다. 그녀가 쓴 소설에 등장했던 진이를 겁탈하고자 했던 그놈이 현기자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허국장은 이발이 부드득 갈렸다.

, 장서장. 나야. 아까 그 놈 말이네. 꽤 있는 집안이라 돈으로 합의하자 할 것이야. 절대 합의하지 않을거니까 자네가 알아서 사람 구해 대변하여 처넣고 길게 길게 감옥에서 썩게 해주게.

 이른 아침 요란스레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허국장은 잠을 깼다.

국장님, 지금 어디십니까? 빨리 사무실에 나오셔야겠습니다.

저녁내도록 진이의 옆에서 잠을 설치며 간호를 하다 새벽녘에야 깜빡 잠이 허국장에게 아침일찍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바로 전비서였다.

아침부터 이리 호들갑인가?

전화로 못하니 빨리 나오셔야겠어요. 만나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비서의 전화에 웬지 모를 불안감이 허국장의 몸을 덮쳤다.

한편 대상수상자 명단이 발표되자 윤소율은 적지 않게 충격을 먹었다. 5년동안 잠적해 행방을 알수 없었던 투구꽃이 나타났고 공교롭게도 자신이 카피해낸 그 글로 이번 대상에 승부수를 걸었다. 작협에서 긴급위원회를 결성해 표절사건을 조사하고 있고 또 이때문에 징계조치가 내려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마냥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일이였다.

어떻게 쌓아온 이미지이고 자리인데 이대로 무너질순 없어.

윤소율은 입술을 피날 듯이 깨물었다. 우연히 투구꽃의 행방을 조사하다가 그녀와 허국장이 함께 썼던 듀엣글을 발견하게 되였고 수상한 낌새를 느낀 윤소율이 허국장의 뒤를 밟았던 것이였다. 그리고 운좋게도 마침 둘이 뜨겁게 포옹하고 키스를 하는 장면까지 몇컷 입수를 했다. 바로 문학사이트에 모조리 띄워버렸다.

나혼자 죽을순 없지 안그래? 우린 전생에부터 원쑤였나봐. 이생까지 악연이 이어지는걸 보면. 그 고리를 이제는 끊자.

허국장이 사무실에 도착해보니 아수라장이 되여있었다. 여러 문학사이트에 허국장과 어떤 녀인이 부둥켜 안고 있는 사진이 떠있었는데 그 밑에는 이번 대상 수상자 박수진과의 스캔들이라는 커다란 제목이 붙어 있었다. 내용인즉 협회 국장과의 그렇고 그런 사이로 인해 대상 수상자가 될수 있지 않았냐는 어이없는 비리의혹이 담겨져있었다.

그의 휴대폰이나 협회사무실로 전화가 빗발치듯 걸려왔다. 대부분은 허국장의 안위를 걱정했고 꽃뱀한테 물린게 아니냐니 신고를 하라니 정말 그런 일이 없냐니 사람마다 하는 말이 다 틀렸지만 그 뒤에는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날가 하는 사람들의 얍삽한 생각이 숨겨져 있었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사람들의 그 시선, 신세대를 키워내라 했더니 오히려 흉측하게 애인을 키웠다는 식의 해석들에 허국장은 머리가 찌끈거려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증발하고 싶어지는 나날의 련속이였다.

그렇게 대상수상자 명단 공포가 된지 얼마 안되 뜬금없는 스캔들때문에 수상작에 대한 관심은 급속도로 시들해져 바람속에 묻혀버렸다. 사처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밀려드는 협회일들을 처리하느라 허국장은 숨통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19.

그렇게 며칠이 흐른 뒤였다.

신문에 어떤 녀작가를 겁탈을 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한 어떤 파렴치한 기자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에 이어 그 녀작가가 5년전 그 남자에게 당했던 성추행사건과 최근에 발생한 유사사건에 대하여 상세하게 증거를 제출했고 법원에서 유력한 증거를 확보하여 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보도가 났다. 인터뷰를 하면서 주위의 기자들이 짓꿎게 허국장과의 스캔들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을 때 그녀의 대답은 아주 단호했다.

저한테는 문학이 무엇인지 가르친 분이셨고 올곧은 인생관과 민족애를 지닌 인재양성에 사력을 다했던 따뜻한 스승이였습니다. 누가 그 애매한 사진을 제출했는지 모르지만 현승우의 마수에서 저를 지켜내고자 한 그분의 용기가 있었기에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결백합니다.

그녀의 인터뷰기사 이후에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은 허국장에게서부터 박수진 그녀에게로 전이가 되였다. 세치 혀가 사람을 잡는 세상이라 그녀가 당했던 모든 일들은 여러 사람들의 입도마에 올라 수없이 난도질을 당했다.

인터뷰기사를 확인하기 바쁘게 허국장은 허둥지둥 그녀의 가게를 찾아갔다. 허나 이미 양도되였고 가게주인은 낯선 사람이였다. 허탈한 마음으로 털썩이며 가게를 나오다가 저도 몰래 박스등우의 그림에 서서히 시선이 갔다. 걸려 있는 그림속 예쁜 천사는 날개가 접혀져있었다. 날개접은 천사허국장은 몰려오는 현기증에 휘청거리며 겨우 문을 나섰다.

그렇게 그녀는 이슬처럼 사라졌다. 허국장을 대신해 과녁이 되여 여기저기서 던져오는 화살을 받아내느라 만신창이 되여 있을 진이를 생각하면 그는 심장이 찢겨나간거 같아 숨을 쉴수 없었다.

그뒤 현기자는 두번의 강간미수죄로 법의 제재를 받아 8년형이 선고되였고 윤소율 역시도 표절사건으로 인해 작협에서 제명을 당하고 문단을 떠났다.

박수진과 윤소율의 문단 데뷔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온라인 문학은 신세대 작가들을 양성하는 하나의 통로로 되였고 잡지사에서는 글로벌시대 독자들의 요구에 따라 웹소설 사이트와 계정을 만들어 맞춤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작품을 내보냈다. 그렇게 개설된 웹소설사이트는 세계 각국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큰 사이트로 발전해 인기를 누렸다. 개혁은 그렇게 허국장과 송우경편집을 비롯한 문단일선에 선 사람들 덕분에 활기차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딸애가 대학에 입학하고 회장임기가 끝나가자 허국장은 일찍 신변의 모든것을 정리하고 홀로 시골집에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전에 송우경 편집은 토론토의 어떤 익명의 사업가로부터 날개 접은 천사문학상 후원금을 전달받았다. 편지의 뒤면에는 이렇게 적혀져있었다.

문단 개혁 멋졌습니다. 우리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드립니다.

그리고 문단은 어떤 익명의 작가가 보내오는 글에 다시 한번 들썩거렸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듯 탱탱 여문 글들을 쉴새없이 뽑아내는 그 녀작가는 프로필도 신상도 공개하지 않고 오로지 오리온이라는 필명으로 온 오프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어느 문학장르를 막론하고 상을 꿰차는 그 녀작가에 대한 문단의 관심은 점점 뜨거워졌지만 작가는 신상정보 반점 흘려주지 않았고 그 어떤 시상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익명의 녀작가가 글중에 그대안에서 뛸게요라는 소설은 여러 문학사이트에서 동일한 시간에 련재를 정도로 인기를 크게 누렸다. 한 녀작가가 심장병을 앓고 있는 스승과 사랑이 싹트는 내용이였는데 비운의 주인공은 결국 마감에 교통사고로 사망을 하고 심장을 사랑하는 스승에게 이식을 하는 걸로 새드같은 해피엔딩으로 글이 마무리되였다.

글의 마감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었다.

내게 뜨거운 심장을 주신 그대, 이제 그대에게 돌려드립니다.

투명한 액체가 허국장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 글귀를 애달프게 어루만졌다.

며칠후였다.

토론토로 가는 비행기안에서 허국장은 뭉게뭉게 피여오른 구름을 바라보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멀리 산이 보이고 흐르는 물이 보인다. 개울가에 앉은 소녀는 발갛게 익은 입술로 시를 읊조리고 있다. 그뒤에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한 소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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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숙 프로필

닉네임 수선화향기

1981년 11월 25일 길림성 서란 출생

동북재경대학 금융학부 졸업

료녕신문에 수필 "가시있는 인생이고 싶다 "를 발표하면서 등단.  지금까지 시, 수필, 중단편소설 다수 발표.

중편소설 <그대 안에서 뛸게요>로 연변작가협회 청년문학상 동상 수상. 단편소설 <언덕이 무너지는 소리>로 <도라지>문학상 소설부문상을 수상(2020년)

무역업종사, 온라인꽃방운영

연변작가협회 회원, 청도작가협회 부회장 겸 소설분과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