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들에 아름다운 봄꽃들이 활짝 피어나게 할래요

칭다오조선족여성협회 이계회 회장

 

 

▲사진설명:이계화 회장

 

푸른섬 흰 파도 송백은 푸르러

우리는 자랑찬 조선족여성들

어른을 존중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며

오늘도 가정화목 이끌어가네

아- 아-

푸른섬 수놓아가는 우리는

자랑찬 여성협회라네

 

  언제 들어도 칭다오에서 살아가는 조선족여성들의 지혜롭고 아름다운 형상을 연상시켜 볼 수 있는 칭다오조선족여성협회 회가이다.

 이 여성협회 회장 이계화씨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우선 먼저 그의 지적이고 매력적인 미모에 빠져든다.

  일본 글로벌10대 상사의 수석대표로, 내조의 여왕으로, 또 여성협회 회장으로의 성장스토리를 함께 공유하다보면 이계화 회장의 긍정적인 마인드와 찬란한 미소 그리고 식을 줄 모르는 에너지와 여성협회에 대한 장밋빛  희망이 솟아난다.

  이계화 회장은 말한다.

  일화독방불시춘, 백화제방춘만원(一花放不是春,百花放春满园)이라고. 뜻인즉 칭다오에 살고 있는 아름다운 조선족여성꽃들이 산둥땅 및 지구촌 방방곡곡에서 활짝 피어나는 날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말단직원으로부터 방직업계의 화제인물로 

  1992년 10월22일,이계화씨는3000여명 경쟁자를 물리치고 일본 10대종합상사인 쵸리주식회사에 취직했다. 당지인 최고엘리트들로 집중된 일본상사는 그야말로 경쟁이 치열했다. 동북에서 온 조선족여성인지라 배척도 엄청 심했다. 그럴때마다 이계화씨는 꾹 참고 “내가 꼭 너희들에게 우리 조선족여성의 미덕과 위상을 보여줄거야” 하고 다짐을 하였다.

  1998년 일본 오사까에서 국제적인 복장상품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세계에서 내노라 하는 복장 거두 회사들이 모두 참석하는 대형 행사였다.

  이계화씨의 뛰어난 업무능력을 줄곧 지켜보아온 니노미야 소장이 이번 전시회에서 칭다오대표처를 대표하여 전체 산둥성의 섬유현황을 홍보하는 임무를 그녀에게 맡겼다. 산둥성내에 수백 개의 면사, 편직, 염색, 봉제공장들에 대한 요해와 대표적인 공장 선정, 샘플 제작, 가격 제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임무가 이계화씨의 어깨에 떨어졌다.

  낮에는 두터운 중국방직협회 명부록을 뒤져가며 공장들과 업무연계하고 저녁에는 그 서류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느라 해천호텔 1200호 사무실의 불빛은 몇달동안 밤 12시전에 꺼질 줄 몰랐다. 칭다오에 온 일본 바이어들도 불이 계속 켜져있는 사무실문을 떼고 들어왔다가 밤늦게까지 일하는 이계화씨를 보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하루종일 컴퓨터일에 너무 매달리다보니 눈에 알레르기가 나서 병원을 찾았다. 과로로 무조건 입원해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심하면 실명까지 갈 수 있다고 했다.

  전시회가 임박해오는데 어떻게 입원을 한단 말인가. 이계화씨는 간단한 처치를 거친 후 눈에 안대를 걸고 일본으로 출장갔다. 공항에 마중나온 일본 본사의 한 부장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머금고 말하였다.

  “무리 시나이데 구다사이”

  이계화씨는 그저 가볍게 웃기만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였다. 유일한 외국인, 그것도 어여쁜 아가씨가 눈에 안대를 걸고  유창한 일본어로 열심히 산동성 섬유업계를 홍보하는 모습, 수많은 업체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일본에서 진행된 복장행사에서 처음으로 중국 산둥성의 방직업이 어떻게 발전해왔으며 아름다운 해변도시 칭다오의 방직 우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쵸리회사는 원래 식품, 화공, 기계, 방직 등 종합상사로 일본의 글로벌 상사가운데서 10위권에 드는 어마어마한 종합상사이다.  이번 복장상품전시회를 계기로 방직분야의 영업액이 급상승하여 칭다오대표처의 주력 업무로 뛰어올랐다.

  이계화씨의 피타는 노력이 일구어낸 눈물어린 성과였다.

  일본 원사업계 유명한 (주)유니치카의 책임자가 새로운 원단개발을 칭다오대표처에 맡겨왔다. 특히 이계화씨가 책임지게 해달라고 조건부를 달아왔다. 오사까전시회에서 너무나 좋은 인상을 받아 큰 오더를 내어준 것이다.

  당시 칭다오제1면방직공장 등 수많은 면방직업체를 찾다가 선정한 것이 산시성 시안양(咸)에 있는 서북국면제1공장(西北棉一)이다. 그때부터 이계화씨는 한달중 20일을 시안양에서 보냈다. 1년 동안의 개발을 거쳐 옷에서 생기는 전기를 차단할 수 있는 세이덴시 (制電) 새원단 개발에 성공했다. 당시 섬유업계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후에 중국에서 발간된 ‘중일무역수책’ 책자에 국면1공장과 일본간의 원사개발 내용이 비즈니스의 성공모델로 나왔는데 그속에 이계화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해있다.

 

 외국인 최초 일본 10대 상사의 수석대표로

 이계화씨는 탁월한 업무수행능력으로 1998년도에 쵸리 칭다오대표처 소장 대행, 2000년도부터 정식으로 칭다오대표처 소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전세계적으로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대형 글로벌상사의 대표처에 일본인을 제외한 현지인 등용이 역사상 처음인지라 그야말로 빅뉴스가 될 정도였다.

  일본언론사들에서 쵸리 본사 사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왜 하필이면 외국인을 그것도 조선족 여성을 등용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수없이 물어왔다. 본사 사장은 글로벌시대에 현지화를 해야 한다고 대답해주었다.

  소장으로 발령되던 날 이계화씨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해변가를 나왔다. 검푸른 바다는 해안가의 불빛에 반사된 번뜩이는 파도를 끊임없이 해안쪽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파도는 생성되어서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무연한 해안가를 향해 돌진한다. 그리고 해변가에 와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면 뒤따르던 파도가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이계화씨의 마음은 저으기 격동되어 있었다.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이 마치 저 파도와 같이 정든 고향을 떠나 해변도시로 취직과 창업의 길을 나서는 것이다. 더 아름다운 생활을 위해 쉼없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마치 무거운 것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후련했다.  어느새 뜨거운 것이 눈길을 가렸다. 

  “내가 해냈어. 끝내 해냈어. 우리 조선족여성이 어떻게 우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끝내 보여주었어”

  2009년 칭다오 쵸리대표처의 수출실적은 1억 달러 정도였는데 이계화 소장이 주관하는 섬유분야의 업무가 수출액 5000만 달러로서 주력제품으로 우뚝 솟아올랐다. 연후 그의 업무량은 매년 성장일로를 달려왔다.

  칭다오시정부 산하 국제무역촉진회(CCPIT)에서도 그해 연말총화행사에 이계화씨에게 ‘자랑스러운 중국인상’을 수여했다.

  일본상사 소장이 되고보니 회의와 출장이 잦아졌다. 국내외 각 대표처를 3개월에 윤번으로 돌면서 진행하는 회의, 일본 본사의 각종 회의, 여기에 업무까지 겸하다보니 이계화씨는 항상 한가할 날이 없었다. 남편은 훌륭한 사업가로서 부인보다 훨씬 바쁜터라 가정일에 아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7살 나는 어린애는 보모에게 맡겨 보살피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칭다오사무실에서 일본상사대표 월례대회를 주관하느라 겨를이 없는 이계화씨에게 집전화가 여러번 걸려왔다. 무음(音)상태라 또 별로 개의치 않게 여겼는데 옆에 있던 비서가 관심조로 물어왔다.

  “오늘 집 아이가 아파서 학교도 못가고 집에서 있다는데 괜찮아요?”

  그제야 정신이 버쩍 든 이계화씨는 그대로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갔다. 급히 달려 내려가다보니 신발이 벗겨져 하마트면 계단에서 굴러떨어질번 하기도 했다. 집에 도착해보니 아닌게아니라 아이가 혼수상태에 있었다. 120을 불러 급히 병원으로 호송했다. 뒤에서 보모의 울음 섞인 잔소리가 들려왔다.

  “일만 일이라고 보배아들이 이렇게 될 때까지 그냥 방치해도 되는거요?”

  그 말에 이계화씨는 급소라도 찔린 듯 마음이 아파났다. 기별을 받은 남편도 황급히 병원에 달려왔다. 꼬박 이틀 낮과 밤을 혼수상태에 있던 어린애가 그제야 겨우 눈을 떴다.  뜬눈으로 지새우며 간호하던 이들 부부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후 내쉬였다. 순간 두사람의 눈은 서로 맞부닺쳤다.

  “니 뿌깐 워 뿌깐?”

  중국어에 익숙해진 남편이 당신이 그만두고 아이를 보느냐 아니면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를 보살필 거냐고 중국말로 물어온 것이다.

  “워 부깐!”

  이렇게 이계화씨는 18년동안 근무하던 일본 상사 대표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사랑하는 자식과 남편 가정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업에서의 성공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으나 사랑하는 자식과 남편 가정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것이다.

 

  내조의 여왕  

  2009년 12월 30일자로 정식 사임하니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집에 들어서니 복도에서부터 집안에 장미꽃이 가득 쌓여져 있었다. 그사이 때묻은 본사 동료들하고 회사 직원들이 정성이 담긴 각자의 감사 메모지를 장미꽃과 함께 집으로 배달해온 것이다. 또 남편의 배려로 칭다오에 있는 친척들이 몽땅 모여 뜨거운 박수소리로 이계화씨를 맞이해주었다.

  그녀의 본격적인 평생 동경해오던 행복한 가정주부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남편이 회장으로 있던 자오저우기업협회 30여 명 회장단 임원들을 전부 초청하여 집에서 풍성한 음식을 차려 대접하기도 하였다.

  일본회사에서 길들여진 치밀하고 규칙적인 습관이 가정생활에까지 연장되어 왔다. 시부모와 친척들에 대한 못다한 효성과 사랑도 막힘없이 잘 보완해나갔다.

  그나, 이 쾌적한 향락도 얼마 가지 못했다.

  원래 회사인 쵸리 칭다오대표처의 가장 큰 바이어였던 야스끼(保木)회사가 칭다오에 지사를 설립한다며 여러번 그녀에게 요청을 해왔다.

  그녀는 매번 단호히 거절을 해왔다.

  어느날 저녁 남편이 식사후 그녀와 대화를 나누자고 했다.

  “야스끼 회장이 어떻게 내 전화를 알았는지 만나자고 해서 만났더니 당신의 부인을 하루 반나절만 회사에 돌려줄수 없냐고 물어왔어요”

  이계화씨는 놀란듯 남편의 두눈을 쳐다보았다.

  “일본 대기업의 회장이 이렇게 몇번이고 모시려고 성의껏 요청을 하는데 남의 진심을  너무 무시하는것도 예의상 아닌것 같아요. 잘 고려해봐요”

  야스끼회사는 이계화씨가 쵸리소장으로 있을때 처음으로 중국에서 유니크로 업무를 개발한 회사로 침직 내의 전문수입회사인데 현재는 이 분야에서 앞자리 2위를 다투는 거두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이계화씨가 회사를 그만둔 이후 쵸리 칭다오 책임자로 일본인 여러 사람을 바꾸어 보았지만 여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기어코 이계화씨를 새로운 대표처 소장으로 모시려고 하는 것이다.

  남편의 권유로 주부생활 1년만에 이계화씨는 재다시 무한도전의 길에 들어섰다.

  그녀가 나서자 회사의 업무실적도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오더 한건이 몇 억 위안씩  내려오군 했는데 2007년부터 칭다오세관에서 한건의 오더 물량이 줄곧 가장 큰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가정부주로부터 다시 야스끼회사에 출근할 때 1년만 근무하기로 약속했던 것도 계속되는 만류로 연기되어 어느덧 8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2014년  11월 일본 섬유방직협회의 추천으로 일본에서 가장 큰 상인 천황상을 수여받았다.   42년만에 수여하는 천황상이라 한다.

 “그래 해냈어. 조선족으로서, 그리고 조선족여성으로서 해냈어. 우리 민족여성이 어떤 사람들이란 것을  일본인들한테 보여주었어.”

  이 모든 행복과 성공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 덕분이다.

  남편은 바쁜 일정속에서도 부인이 사업상 고민이거나 상담이 있으면 무조건 충실한 멘토가 되여준다.

  보배아들도 엄마아빠가 열심히 사는 뒤모습을 보고  제법 훌륭한 청소년으로 성장해서 현재 미국에서 의젓한 고등학생으로 분발하고 있다.

 

  더 높은 하늘을 항하여 - 여성협회 회장으로   

  2002년도에 설립된 칭다오조선족여성협회는 칭다오조선족사회단체 중 기업협회, 노인협회와 함께 3두마차로 조선족사회발전의 견인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특히 2008년 베이징올림픽 칭다오수상항목경기 당시, 환경파괴로 인해서 해안으로 밀려드는 해파리떼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때 여성협회 회원들이 자신의 고운 옷을 버려가면서 해변가에서 악취가 나는 해파리를 건져내는 사진이 칭다오뉴스에 나오면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그 이후에도 양로원에 계시는 조선족노인분들을 관광버스로 모시고 해변유람을 시키는 효도관광행사, 잊혀져가는 후대들에게 한글을 가르키는 민족교육 학습반 조직 등으로 위상이 확립되어 있다.

  이계화씨는 자신의 아들과 똑같은 나이의 여성협회의 창시멤버이다. 이옥단 초대회장, 김옥 2대, 김미정 3대회장을 항상 뒤에서 묵묵히 받들면서 물심양면으로 많은 지지와 기여를 해온 그녀였다.

  이렇게 중요한 여성협회 단체의 수장으로 이계화씨가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그 싯점이 바로 2017년 11월 16일이다.

  훌륭한 보배아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니 이젠 협회를 위해서 일선에서 봉사해달라는 회원들의 간곡한 부탁이였다.

  금년 1월 7일 칭다오조선족여성협회 신년회가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회장이 되고나서 오직 협회 일에만 올인했다. 전임 회장들의 노고에 대해 참 수고 많았겠구나 하는 감도 많이 체험했다.

  2월 2일 이사단회의, 3월 8일 여성의 날 행사, 4월 15일 회장단 이사단회의, 짧은 시간내에 그녀는 많은 일을 해냈다.

  50여 명으로 구성된 새로운 이사단 임원진을 일일히 체크했다. 원래 한가지에 신경쓰면 끝을 보고야마는 성격이라 인선을 안배하는데 4개월이 걸렸다. 살이 5킬로나 빠졌다. 내분비가 정상이지 않아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를 하는 친구가 의기에서 출력된 의학수치에 보고 놀라서 물어왔다.

  “이계화씨, 당신이 살자고 해요. 죽자고 해요?”

  “아니, 이제 거의 다 마무리되었어요. 이제부터는 건강관리에 신경을 쓸 거예요”

  그녀는 발뺌을 했다. 그만큼 회원이 무려 200여 명이 되는 협회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이상인 것을 잘 알고 있는 이계화였다.

  그녀는 자신의 탁월한 리더쉽을 발휘하여 각 방면에서 가장 우수하고 인품이 좋으며 협회에 대한 애심과 헌신정신이 있는 인재들을 골라 협회의 운영진에 가입시켰다. 강하고 튼튼하며 똘똘 뭉친 우수한 운영진 구성이 향후 여성협회의 향배를 결정한다고 믿고 있었다.

  “민족사회가 저에게 준 중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임감을 넘어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뛰겠습니다. “

  “사랑하는 운영진과 이사단 성원 여러분, 우리 모두 지성과 지혜와 미모를 겸비한 미인이 되어 아(아름다운) 우(우리의) 성(성장을) 을 외쳐봅시다.”

  이계화 회장이 이사단회의때 한 말이다. 인생의 성장을 넘어서 사업과 민족의 성공을 위하여 분투하는 이계화 회장의 심지를 그대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한떨기 꽃이 핀다고 해서 봄이 아니예요. 떨기떨기 꽃들이 산과 들에 가득 필 때에야 진정한 자연의 봄이 옵니다. 즉 일화독방불시춘,백화제방춘만원(一花放不是春,百花放春满园)이예요”

  우리는 여성을 자주 꽃에 비유한다. 이러한 아름다운 여성꽃들이 칭다오시를 포함한 산둥땅 나아가 지구촌 곳곳에 활짝 피어나게 하리라.

 조선족여성들의 아름다움과 민족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는 이계화 회장의 다짐이다.

  개인과 회사의 성공을 넘어서 이제는 민족단체의 위상수립과 성장을 위하여  오늘도 힘차게 달려가는 이계화 회장, 그녀가 이끌어가고 있는 칭다오조선족여성협회의 장밋빛 전망을 기대해본다.

/ 김명숙, 박영만 기자

 202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