龍아저씨의 "상식의 시대"칼럼 2212

네델란드

-郑龙范

 

지난 칼럼에서 네델란드에 관련된 여러가지 기본 이야기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칼럼에는 이 나라의 기본적인 역사의 시작을 이해해볼까 합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법은 매우 많지만, 가장 쉬운 방법은 기본적인 틀을 먼저 잡는 방법이 제일 효율적입니다. 어떤 한나라의 기본적인 역사에 대하여 틀을 갖추고 있으면, 그것 자체로도 '인식의 틀'이 되므로 향후 그 나라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게 되거나, 접할 때 갖추고 있는 인식의 틀이 매우 빠른 이해를 할 수 있는 엔진 역할을 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칼럼을 읽으신 분들은 향후 유럽의 작지만 강한 나라 네델란드라는 이름을 들을 그런 경험을 하실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네델란드의 이야기 속으로 한번 들어가볼까요?

과거 동양인들은 네델란드를 '홀란드'라고 불렀습니다. 이유는 처음 네델란드가 동양에 진출했을 때, '홀란트州'가 가장 큰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네델란드 땅은 원래 '캘트족'이라고 불리던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로마가 강성해지면서 캘트족은 로마에 흡수되고 또는 영국으로 이주를 하게 되어 네델란드 지방의 캘트족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시간이 흘러 로마가 쇠퇴하게 되고 흔히들 지금 '독일인'이라고 부르는 덩치 큰 유럽인 , 즉 '게르만족'이 유럽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게르만족과 뿌리를 같이 하는 '프리센족, 작센족, 프랑크족, 바타비아족'이 이 땅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은 여러 나라가 얽혀있는 대륙입니다. 그리고 그 혼돈과 분열의 원인은 '종교'와 '민족'이었습니다.

1517년 유럽에서는 수세기동안 지배력을 가졌던 '카톨릭'의 권위가 크게 붕괴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을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이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은 유럽인들의 생각의 틀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높은 권위로 무지한 백성들을 다스리면서 군림하던 카톨릭이라는 종교에 대한 각성이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무작정 자신들의 어렵게 모은 돈을 '세금'으로 바치기 싫어했고, 나아가 아예 본격적으로 '카톨릭'에서 '개신교'로 신앙을 바꿔버리는 나라도 생겨났는데, '스위스'와 '네델란드'가 그 대표국가였습니다.

세금을 내던 땅이 갑자기 세금을 안내겠다고 하면서 종교를 바꿔버리면, 그 땅의 기존의 지배권력은 당연히 군대를 파견하고 무력을 행사할 것입니다. 당시 네델란드 땅의 주도권을 행사하던 '에스파냐'는 군대를 파견하게 되니, 어쩔 수 없이 네델란드는 이들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벌였습니다. 치열한 독립 전쟁결과 남쪽의 10개 州는 다시 '카톨릭의 군대'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개신교로 개종을 했다가 다시 카톨릭이 된 땅 10개 주는 훗날 또 하나의 나라로 독립하게 되는데, 이 나라가 바로 '벨기에'입니다.

그러나 어렵게 '개신교'를 신앙으로 지켜낸 북부지역, 즉, 네델란드는 내부적으로는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전체 개념은 '개신교'로 바뀌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카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이 존재했고, 심지어 아예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종교적 갈등은 결론적으로 종교적 자유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인해 네델란드인들은 종교보다는 '실리적인 사고' 를 더 중시하는 분위기가 생겨났으며, 이것이 또 다른 한편으론 네델란드의 상업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원래 캘트족이 살았던 땅은 로마가 지배하자, 캘트족들은 모두 흩어지고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본토가 위태로워지고 썰물처럼 로마인들이 빠지게 되면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프리센족, 작센족, 바타비아족' 같은 게르만족의 계파가 들어와서 살게 됩니다.

그중에서 '바타비아족'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라고 할만큼 뛰어난 로마의 토목기술을 유독 잘 흡수한 종족이었으며, 이들은 훗날 네델란드의 식민지 '인도네시아' 를 점령하여 수도를 건설하면서, 그들의 우수한 토목기술을 기리기 위하여 수도 이름을 '바타비아'라고 명명했는데, 이 이름을 인도네시아어로 부르면 '자카르타'가 됩니다.

아무튼 민족적으로는 '캘트족' 의 거주지였다가, '로마인'의 거주지로 바뀌었다가, 다시 '게르만족의 여러 뿌리를 공유하는 소수 민족의 거주지'가 된 지금의 네델란드 땅은 그렇기에 로마가 빠지자 서로 단결하지 못하고 각각 조그만 부족국가 같은 형태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크게 단결하지 못하고 도시국가처럼 구조를 이루게 되면, 통상 옆동네에서 크고 강성한 세력이 나타나면 당연히 위태로워지는 것이겠죠.

때마침 유럽땅의 중심부에는 강력한 지배자가 생겨났으니, 이를 '프랑크왕국'이라고 부릅니다. 프랑크는 '카를대제 (사를마뉴)' 의 지배 때 유럽의 최대 강성국가로 성장하였고, 변방이었던 네델란드 땅은 자연스럽게 사를마뉴, 즉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사를마뉴가 죽자 프랑크 왕국은 다시 분열되었고, 네델란드는 다시 서쪽은 프랑스의 지배하에, 동쪽은 도이칠란드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네델란드인들은 이렇게 변화무쌍한 지배하에서도 그들만의 자율성을 기초로 여전히 도시별로 상업적 교류를 중심으로 교역하면서 나름 그들만의 삶의 터전을 일구어 나갔습니다.

알다시피 네델란드는 바다를 뚝으로 막고 물길, 즉 수로를 뚫어서 개간한 땅입니다.

그리고 수로는 상업적 교역의 고속도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중국 수나라 때 만들어져서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大운하'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운하를 통한 교역에서 중심이 되는 물건은 '방적기술로 만든 옷감'이었습니다.

네델란드는 중세이후 베를 짜는 방적기술이 조금씩 발달하고, 이를 상업적으로 활용하여 돈을 벌게 되면서, 수로를 끼고 있던 각각의 도시들은 점차 번성의 틀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플랑드르'지방의 제품은 품질이 좋아서 '유럽귀족'들의 옷을 책임지는 핵심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플랑드르 지방을 탐내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자주 플랑드르를 위협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는데, 프랑스를 큰 위험으로 생각한 '플랑드르왕조'는 당시까지만 해도 매우 가난하여 상업은 없고, 오직 양털을 깍아서 방적기술이 발달한 플랑드르 지방에 공급하는 것이 주요 수입이었던 영국을 데리고 프랑스와 연합하는 작전을 펼칩니다. 그리고 이 연합은 마침내 전쟁으로 변하니 이를 '백년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백년전쟁은 유럽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렇게 다른 이유가 있으며, 심지어 프랑스에서도 플랑드르와 가까운 지역이었던 '브루고뉴 지방'은 오히려 '영,플랑드르'와 연합을 해버렸습니다. 브르고뉴는 완전히 프랑스에 복속된 상황이 아니었는데, 이 지방의 우수한 와인을 프랑스 왕국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보전하기 위한 연합이었던 것입니다.

브르고뉴는 전쟁에서 파리의 문을 열고 영국군이 입성하게 하였고, 백년전쟁의 유명한 영웅 '잔다르크'의 활약으로  프랑스가 승리하자, 잔다르크를 영국에 보내서 죽여버리는 계략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브루고뉴 와인은 매우 질적으로 우수하지만, 그 와인을 마실 때 잔다르크의 죽음을 한번 생각해볼 만한 스토리입니다.

어쨌거나 이런 전쟁에서의 여러가지 처세술을 펼친 '브루고뉴' 왕조는 결과적으로 네델란드지방을 전부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 프랑스와 대적할 수 있는 왕조에 황제의 딸을 시집보내게 되는데, 이때 그들이 선택한 국가는 '오스트리아'였습니다.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다보면, 이렇게 서로 서로 이익을 위해 왕조끼리 혼인을 하는 경우가 매우 많이 있습니다.

당시 브루고뉴왕조의 황제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딸이 바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딸과 결혼한다는 의미는 다시말해 네델란드 지방을 지배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기의 결혼'은 브루고뉴 왕조의 후계자이자 딸인 '마리'와 '오스트리아 황제가 되는 합수부르크 왕조의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입니다. 아울러 당시 막시밀리안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직하고 있어서, 이 결혼 한번으로 막시밀리안은 '유럽의 가장 강력한 중심국가의 지배자'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네델란드의 역사는 '막시밀리안1세'의 후손들의 이야기로 접어듭니다. 막시밀리안은 자녀들을 에스파냐왕조와 또 결혼으로 묶어서, 다시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부르고뉴, 네델란드, 벨기에'까지 다스리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글의 초반에 말했던 '종교개혁'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고, 독실한 카톨릭이었던 그는 네델란드인들의 종교개혁 욕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강력한 군대를 보내서 개신교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황제였던 그가 네델란드인의 눈에 '외국인 폭군'으로 변하게 되면서, 상업 위주의 편안함을 추구하던 네델란드인들의 마음 속에 '독립'이라는 두 글자가 불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번성했던 왕조는 시간이 지나면 쇠락하는 법입니다. 합스부르크 대왕조는 강력한 왕이 죽고 시간이 흐르자 통치했던 지역의 지배력이 조금씩 약해져갑니다. 그 결과로 더이상 지배하기 힘들어지자 '에스파냐, 오스트리아'로 나뉘게 되고, 이때 네델란드인들도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독립을 하려는 네델란드와 독립을 허락할 없었던 에스파냐의 전쟁 과정에서 힘이 약했던 네델란드인들은 무수히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최초 네델란드인들을 단결시켰던 위대한 '빌럼, 호르네, 에흐몬트' 라는 세명의 독립 지도자 중 두명은 전쟁 중에 에스파냐의 군대에 잡혀서 사형을 당했고 살아남은 한명은 빌럼은 해외로 도망쳐서 끝까지 독립운동을 벌이겠다는 '네델란드 독립선언'을 하는데, 이 때의 선언을 기점으로 1648년 네델란드의 독립이 이루어지기까지의 80년을 '네델란드 독립전쟁' 이라고 부릅니다.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해외에서 활동을 한 것과 참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입니다.

80년 전쟁의 결과 에스파냐에 굴복하게 된 남부의 10개 주를 현재 우리가 '벨기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홀란트州'를 중심으로 끝까지 독립을 쟁취한 북부의 땅을 '네델란드'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렇기에 네델란드와 벨기에는 원래 뿌리가 같은 형제 국가 입니다. 벨기에는 80년의 독립전쟁이 끝나는 1579년에 다시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다가, 183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처절한 투쟁의 결과로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한 네델란드는 당연히 에스파냐와 사이가 좋을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해양패권을 두고 일어난 전투 '에스파냐의 무적함대'와 '엘리자베스1세'가 이끌고 오늘날 '캐리비안 해적'의 모델이 되기도 한 '드레이크 백작'이 이끌던 영국의 함대는 1588년 대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때 네델란드는 영국의 편에서 전쟁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원래 해적이었던 '드레이크 백작'의 야습과 화공작전으로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아르마다의 무적함대'는 처참한 패배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던 '에스파냐'는 완전히 쇠퇴기를 맞이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과 '네델란드'는 황금기를 맞이합니다. 특히 먼저 바다에 나간 네델란드는 유럽의 작은 변방국가에서 세계를 호령하는 바다의 지배국가로 지위가 바뀌었습니다. 훗날 에스파냐는 네델란드와 다시 한번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힘이 빠진 에스파냐는 네델란드를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참고로 네델란드와 에스파냐의 두번째 전쟁은 비단 두나라만의 전쟁이 아니라, '개신교'를 믿는 유럽의 신흥세력과 '카톨릭'을 믿는 세력간의 대 충돌이었으며, 이는 유럽에서 일어난 세계 대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교와 신교의 종교갈등으로 빚어낸 유럽에서 일어난 대전은 30년간이나 지속되었다고 하여 '30년 전쟁'이라고 부르며, 이 전쟁의 끝에 유럽은 개신교의 국가와 카톨릭의 국가를 서로 완전하게 인정하는 조약을 맺게 되었으니, 세계사를 공부하다보면 누구나 한번 들어봤을 이 조약을 '베스트팔렌조약'이라고 부르며, 결국 이 조약으로 '네델란드'라는 나라는 완전하고 공식적인 국가의 탄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의 역사는 서로 물리고 물립니다. 어제의 이웃이 오늘의 적이되는 모습을 유럽의 역사에서는 무수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영국과 네델란드는 그런 사이였습니다. 에스파냐를 대신하여 먼저 세계적인 대항해 국가가 된 네델란드를 영국은 또 시기하고 있었으며, 섬라였던 영국의 입장에서는 바다는 생명의 젖줄이었기에, 오랜기간 강력한 해군력을 양성하는데 힘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651년이 되자 영국은 청교도 혁명을 끝내고 나라의 패권을 가진 '크롬웰'이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모든 교역을 위한 배는 '영국의 배'만 사용해야 한다는 '항혜조례'라는 것을 발표합니다.

유럽의 지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네델란드는 위치적으로 벨기에와 프랑스를 남쪽으로, 동쪽으로는 독일을 국경에 접하고 또 바다 건너서는 영국을 마주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즉, 네델란드의 모든 배는 대항해를 위한 교역을 위해서는 영국과 유럽대륙 사이의 바다길을 지나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길을 통과하는 모든 배는 영국의 배로만 움직일 수 있다는 이 말도 안되는 '항혜조례'는 네델란드로서는 매우 어이가 없는 정책이었으며, 결국 이 두나라는 충돌하게 되니 이를 '영란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영란전쟁'이후 힘이 많이 빠진 네델란드를 남쪽에서는 프랑스가 공격하니 이를 '불란전쟁'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에스파냐 다음으로 대항해시대를 지배했던 네델란드는 다시 평범한 유럽의 작은 나라로 변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유럽의 역사 중심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네델란드라는 나라의 흥망성쇠를 이렇게 알아봤습니다. 한나라의 역사를 짧은 글 속에 모두 담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보는 '풍차와 아름다운 튜울립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실제 그들의 역사는 매우 오랜기간 종교와 민족과 다양한 왕조의 지배하에서도 자신들의 중심을 잃지 않고 투쟁하고 또 투쟁하여 어렵게 쟁취한 '독립의지'를 가진 민족국가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태생부터 거친 바다를 둑으로 막고 개간하여 만든 땅이었으며, 한번도 아니라 로마때부터 시작하여 나폴레옹 시대까지도 유럽의 강국들의 지배를 받아오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독립을 이루어낸 강인한 의지를 가진 그런 나라임을 어쩌면 우리는 그들의 밝은 오렌지색 국기만을 보면서 착각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네델란드의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202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