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조선족골프협회 계렬보도 11

나와 골프 이야기

 

골프는 인생의 과정일 뿐입니다

칭다오조선족골프협회 초대회장 현명광 사장의 일가견

기차 타고 골프 치러 가던 시절의 회억

사진설명: 현명과 사장

 

  

  고향에 출장 갔다 돌아온 현명광 사장(57)을 만나러 13일 오전 노산구 원거화() 화원에 위치한 사무실에 들어서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20여년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1999년 칭다오에서 골프를 치던 사진, 2000년에 베이징에서 제1기 전국대회에 참가하던 사진 등이 줄느런히 진렬되어 있고 수상 상패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한때 골프를 좀 했디요

  현명광 사장은 짙은 평안도 어투로 지난날의 즐거웠던 일들을 회억했다.

  고향이 요녕성 무순인 현명광씨는 1988년에 허베이지질학원(현재 허베이지질대학) 을 졸업하고 베이징지질전과학원에서 공정지질학을 가르키는 교사로 1년간 근무하였다.  1989년에 그는 공직을 버리고 톈진 탕구(塘沽)개발구에 있는 미국신기술무역회사에서 무역업무를 시작했다.

 1993년 현 사장은 칭다오에 진출하여 1년간의 준비를 거쳐 1994년 노산구 중한진(韩镇)에 김흠화학섬유(金)공장을 차렸다. 섬유원료를 생산하는 회사였다. 후에는 한국으로부터 월 5000톤의 팻트병을 대량 수입해 들여와 국내에 판매하였다. 파이바(涤纶纤维) 형태의 이 제품은 당시 이불, , 방한복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되었다.

 현 사장은 1995년에 우연히 베이징에 있는 한 친구한테서 7번 아이언 골프채 하나를 선물받았다. 호기심이 동한 그는 골프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너른 공장 마당에 간이 연습시설을 만들어 놓고 시간만 되면 골프연습을 하였다. 그러다가 노산구에 한국인이 경영하는 88골프연습장이 문을 열자 제1호 고객으로 등록했다. 당시 이 연습장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김철호씨를 그 때부터 알게 된 것이다.

  연후 모 한국인 사장한테서 골프채를 선물받으면서 본격적으로 골프연습을 시작했다. 88연습장에서 3개월 레슨을 받고 첫 필드에 나섰는데 성적이 102, 네번째 라운딩 골프성적이 95타로 내려왔다.  1년안에 싱글을 기록했다. 골프에 상당한 소질이 있는 것이다.

 실제 학교 때부터 축구를 즐긴 현명광씨는 대학교에서 학교 축구팀 대장으로 10번 등번호를 달고 다녔는데 별명이 '마라도나'였다.

그런데 이제는 축구 대신 골프에 몰입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골프수준도 축구 못지 않게 상승하였다.

 1999년 봄에 '칭다오맥주컵'국제골프행사가 개최되었다. 한국의 최경주, 일본의 가토(加藤) 및 태국 선수, 중국의 청쥔() 4명 프로선수가 참석한 칭다오맥주컵 국제초청경기였다.

  이 행사의 후원은 칭다오에서 사업하는 요녕 출신의 이영홍 사장이 맡았다. 그의 추천으로 현명광 사장은 프로(PRO)와 아마추어(AM)가 함께 플레이를 하는 경기에 참가하였다. 현명광씨는  당시 일본의 가토 선수와 한팀이었는데 쟁쟁한 적수들을 물리치고 1등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70여타를 치는 현명광 선수의 골프 실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당시 1등 상금으로 트로피와 함께 현금 5천위안을 수상했다.

 행사 당일 현장을 찾은 칭다오조선족기업협회 남룡해 제2기 회장이 그에게 제안 해왔다.

 칭다오조선족골프협회 설립을 추진해보는게 어떨까요?”

 그렇게 1999 10월에 칭다오조선족골프협회를 설립하기 위한 첫 모임이 국제골프장에서 있었다. 경기 후 일행은 안영길 사장이 운영하는 미익회관에서 협회 설립 경축 만찬회도 가졌다. 기억이 잘못되었을지 모르지만 당시에 참석 인원은 현명광, 남룡해, 안영길, 김철(내몽골 출신), 강빈, 김철호, 이광춘, 임호일씨 등 모두 8명이다. 초대회장으로 현명광 사장이 선출되고 총무는 김철씨가 맡았다. 후에 허헌, 김영숙, 염용식, 임파 등이 가입했다.

  1기 회장단은 이렇게 허헌 고문, 남룡해를 명예회장, 현명광을 회장, 김철 총무로 구성되었다.

  이들이 참가한 첫 대형 대외경기는 2000 10 6일 베이징에서 타이거골프협회 주최로 개최된 전국제1기조선족골프대회였다. 칭다오에서는 현명광 회장을 단장으로 김영숙, 안영길, 김철호, 강빈 등 5명 선수가 출전하였다.

실제 현명광 사장은 베이징에서 골프를 치는 사장들과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베이징에서 조직하는 골프대회에도 내빈자격으로 자주 참석했는데 1999 4 30일 중국조선족(베이징)골프대회에서 신페리어 1등을 쟁취하기도 하였다. 베이징 홍태화 등 친구들과 골프를 치면서 이들은 전국조선족골프대회를 개최할 계획에 대해 함께 논의하였고 칭다오팀은 현명광씨가 맡기로 한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 칭다오팀은 단체우승과 남자 스트로크 우승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번 경기에서 현명광 사장은 신페리어 6등을 차지했다.

  현명광 사장이 칭다오 선수들을 거느리고 골프채를 메고 기차를 타고 베이징에 가서 노력한 성과가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 이들은 천안문광장에서도 소중한 추억의 사진을 남겼다.

  2000년 베이징에서 있은 제1차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하면서 그 이듬해인 2001년 전국대회 개최지가 칭다오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후 현명광 사장은 사업체를 톈진과 상하이로 옮겨갔기에 칭다오대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상하이에서 사업하던 2003년 상하이에서 개최된 제4회 전국골프대회에 칭다오팀 선수로 참가한 적이 있다.

   몇년전 현명광 사장은 뇌경색(溢血)으로 대수술을 받고 1년 넘게 회복을 거쳐서야 바깥출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신의 손에서 빠져나온 그의 골프에 대한 생각은 많이 세련되어 있었다. 현재는 골프보다는 수영이나 가벼운 조깅을 즐긴다고 한다. 가끔은 지인들끼리 화산골프장에 다니는 정도라고 했다.

  운동은 꼭 골프만이 아닙니다. 골프는 인생의 한 과정일뿐입니다. 골프에 너무 미치지 말아야 하고 사업에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해야 합니다. 기분좋게 즐겁게 건강단련을 하는데 초첨을 두어야지 액수가 큰 도박이나 하다보면 결국 몸도 마음도 상처를 받습니다. 스트레스 해소하러 갔다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오는 격이지요. ”

  현명광 칭다오조선족골프협회 초대회장의 말이다.

  / 박영만 기자

2020S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