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조선족골프협회 계렬보도 13

나와 골프 이야기

 

전략적사유를 키워라

칭다오두림공예품회사 황민국 회장

 

사진: 황민국 회장

 

 

  황민국이라는 이름 뒤에는 수두룩한 회장 명칭이 따른다.

  칭다오조선족기업협회 제3, 4기 연임회장, 칭다오조선족골프협회 회장, 전국조선족골프협회 회장, 전국조선족골프협회 명예회장

 화려한 수식어 못지 않게 황민국 회장은 하나의 작은 봉제공장 사장으로부터 현재 국제적인 유통업체까지 장악한 글로벌사업가로 변신했다.

고향이 흑룡강성 계동인 황민국(56)씨는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오상사범학원에서 교편을 잡다가 90년대 초 칭다오시로 진출하였다. 봉제완구 생산, 수출업계에서 칭다오시에서 1인자로 꼽힌다

칭다오 산하 현급시 지모에서 세영완구 상호로부터 시작한 완구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은 미국, 유럽 등지로 수출되어 나갔다. 2000 9월부터 회사명칭을 두림(得林)공예품으로 변경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봉제완구 등 제품은 노동밀집형 산업에 속하는 업종으로 인건비가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속성을 갖고 있다.

칭다오시를 포함한 연해지역에서 경제발전과 더불어 모든 가격이 급속도로 튀기 시작할 무렵 황민국 회장은 1년 간의 준비를 거쳐 2011 12월에 연변 도문경제기술개발구에 칭다오두림완구 도문분공장을 세웠다. 칭다오공장보다 규모가 크고 설비가 좋은 도문분공장은 몇백명의 값싼 노동력을 고용하면서 동업계에서 독보적 지위를 확보하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황민국 회장의 전략적 사유는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2016년 두림완구회사에 다년간 오더를 주는 니키(NICI) 완구브랜드 소유의 독일회사가 회사 지분을 양도한다는 소식이 황민국 회장의 귀에 전해졌다. 독일의 동남부 바이에른주(巴伐利) 뉘른베르크(纽伦)시에 총부를 두고 있는 니키독일회사는 독일은 물론 전체 유럽시장에서 니키브랜드 완구제품의 소유권과 독점 판매권을 갖고 있는 굴지의 실력 기업이다. 미국의 자본이 개입되어 있는 회사인데 여러가지 원인으로 회사지분을 처분하기에 이른 것이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황민국 회장의 두눈은 번쩍 빛났다. 인생에 좀처럼 오기 어려운 기회를 놓칠리 만무했다. 그는 산둥성에서 조선족으로서 가장 일찍 변호사업무를 개시한  베이징잉커(盈科칭다오)변호사사무소 김옥 변호사를 찾아 인수위탁수속을 마쳤다. 변호사 인원만 1만여명에 달하는 잉커변호사사무소는 칭다오사무소와 독일 베를린잉커사무소 인력을 동원하여 4개월만에 1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인수합병절차를 원만히 마쳤다.

이로써 황민국 사장은 제조업에서 유통업에 이르는 전체 업종을 아우르는 글로벌 사업가로 재도약하였다. 전략적인 사유와 준비가 없이는 이루어낼 수 없는 장거였다.

황민국 사장의 전략적사유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여러가지 단체장 직을 역임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우고 스스로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황민국 사장은 칭다오조선족기업협회 제3, 4기 회장직을 연임했다.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연임이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연변자치주 칭다오대표처가 설립되어 있었는데 그 때부터 황민국 회장은 이들 칭다오주재원들과 친목을 쌓아 지금까지도 돈독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두림공예품 연변 도문공장의 설립과 승승장구가 이러한 끈끈한 인맥관계에 기초했음은 더 말할나위가 없다.

기업협회의 전임회장으로서 그는 시종 기업협회의 발전에 중시를 돌리고 있다. 금년에 부임한 제11대 배철화회장의 주도하에 칭다오조선족기업가협회가 새로운 협회 사무청사에 입주한다는 소식을 듣고 황민국 회장은 현금 10만위안을 선뜻 협찬하였다. 젊고 패기가 있는 후배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이다.

기업협회 회장직을 내려놓은 황민국 회장에게 더욱 큰 짐이 안겨졌다. 칭다오조선족골프협회 회장직을 맡게 된 것이다. 기업협회 회장직과 골프협회 회장직은 당시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그럴만한 사연이 있어서였다. 2011년 전국골프대회를 칭다오에서 개최하는데 총대를 멜 사람으로 황민국 회장이 추대된 것이다.

일단 책임을 맡았으면 확실하게 일하는 성격의 황민국 회장은 박일화 비서장과 더불어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그림 그리기에 들어갔다.

전국대회 개최를 1년 앞둔 어느날 , 황민국 회장은 칭다오에서 잘 나간다는 조선족사장 30명 좌우를 초청하여 골프를 치고 청양구 더타이(德泰)대주점에서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명년에 칭다오서 개최하는 전국대회는 타지역 조선족들에게 칭다오 조선족들의 우수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자존심을 걸고 최선을 다합시다”

말을 마친 그는 현금 12만 위안을 협찬하겠다고 태도표시하였다. 자리에 앉은 순서대로 매 사장이 최저 5만 위안 협찬을 승낙받았는데 당일에 120만 위안이란 종자돈이 모아졌다.

2011년에 칭다오에서 치러진 전국조선족골프대회는 당시 사상 최대규모로 가장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한국의 유명한 남진 가수가 현장에서 노래를 하고 한국 개그맨 겸 골퍼인 최홍림씨가 사회를 맡아 잊지 못할 추억의 무대를 장식하기도 했다.  호텔도 3개나 사용하였는데 이런 화려한 행사를 원만히 치른 후 무려 40여 만 위안의 수익을 남긴 대회로 기록되고 있다. 후에 사람들은 당시의 모금동원 저녁식사를 '더타이홍문연(德泰鸿门)'이라고 우스개로 부른다. 황민국 회장의 앞서가는 사유를 볼 수 있는 재미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칭다오에서 치러진 전국골프대회의 성공경험에 힘입어 황민국 회장은 2013년부터 연속 3년 전국조선족골프협회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지방협회 출신 회장이 처음으로 전국회장으로 당선되는 기록을 세웠다. 전국회장으로 당선되니 전국의 상황들이 한눈에 안겨왔다. 드디어 지방에서 보는 시야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전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략적사유를 가질 수 있는 플랫폼에 올라 선 것이다.

회장 부임 첫해에 그는 전체 골퍼들을 이끌고 한국 제주도에서 사상 첫 해외원정 조선족전국대회를 개최했다. 당시는 황민국 회장도 베이징기업인들과 함께 제주도에 별장을 마련하면서 해외 주거지 마련을 꿈꾸던 시기였다.

글로벌시대에 고정된 거처지라는 개념이 무너져버렸다. 필요에 따라 도꾜에 아파트도 마련하고 서울에 사무실도 장만하고 베를린에도 가계를 차리는 시기가 온 것이다. 물론 돈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앞서가는 전략적사유가 우선이 아니겠는가?!

누군가는 위대한 사업가는 필시 우선은 설계가라고 말한다. 미래에 대한 기획이 없는데 그 미래가 어떻게 아름답게 변할수 있을까.

황민국 회장과 골프를 함께 쳐본 사람이라면 드라이브는 겨우 200야드좌우인데도 환상적인 숏 게임에 혀를 내두른다. 전형적인 쓰리온 완퍼터 기질이다.  골프채를 들여다보면 60, 56, 54도 등 어프로치 채들이 남들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라이버를 멀리 날리는 장타자들에게 밀리지 않게 플레이하기 위하여 얼마나 신경을 쓰고 노력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비거리가 남들보다 짧으니 짤라서 정확히 가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노력하다보니 그 짧은 비거리인데도 이글, 싱글, 홀인원을 모두 이뤄냈다.

인생에 전략적 사유도 필요하지만 전술적인 노력도 필요합니다. 사람은 항상 두 다리로 걸어가야 하니깐요. “

황민국 회장의 말이다.

/ 박영만 기자

2020SUS